[문학]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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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밑줄이나 긋고/박기섭 지음, 만인사, 5천5백원

원에 관하여/이정환 지음, 만인사, 5천5백원

최고 권위의 시조문학상인 중앙시조대상 2000, 2002년 수상자인 박기섭.이정환씨가 함께 지천명(知天命.나이 50)을 맞아 나란히 펴낸 신작 시조집.

대구에서 자라고 활동하고 있는 둘은 스무살부터 우정과 문학의 열정으로 '오류시동인''오늘의 시조학회'활동을 함께 하며 시조를 오늘의 시로 손색 없이 일궈오고 있다.

'먼저 정석을 익혀라. 그리고 그 정석을 잊어버려라'는 바둑 이론에서와 같이 박씨는 시조의 전통적 틀, 정석인 3장6구와 자수, 음보에 충실한다.

그러면서 시조야말로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정형률이면서도 시인의 개성에 따라 재창조될 수 있는 '인간율'로 보고 있다. 때문에 정형에 충실한 시에서부터 현대시 같이 자유스러운 행태에 이르기까지 박씨 시조의 진폭은 크다.

"편지 배달 나간 봄빛은 오지 않고//별정 우체국 나직한 창틈으로//바람 난 아래윗 각단 복사꽃만 환한 날"('별정 우체국의 봄'전문)

조그만 마을 우체국에서 바라본 봄 풍경은 전통이 그렇듯 편안하고 한가롭다. 그러면서 3.4,3.4의 자수율에 변형을 주면서 봄을 바라보는 마음을 바람 나게, 들뜨게도 만들며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피거나 말거나 흥, 아무도 눈 주지 않네//개복사꽃 이운 자리 서너너덧 개복숭아//달기는, 고 망할 것이 달기는 또, 고로코롬"('개복숭아'전문)

문장부호 ' , '로 문장의 숨구멍을 닫고 열며 경쾌하다. 전통 음보율에 따르면서 ' , '로 문장의 걸음걸이에 긴장을 주면서 경쾌하면서도 전통에 잇닿은 정서를 피부에 와닿게 하고 있다.

한 수의 단시조는 물론 연시조, 사설시조 심지어 "주루룩...흘러내릴 듯...미끈대는...봄의...성기(性器)"('꽃' 전문)라는 종장 한 장만의 '단장시조'로까지 나가며 시조를 끊임없이 현대화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박씨는 "시조 3장의 행간은 마땅히 금욕의 공간이 돼야 한다. 팽팽히 당긴 현(弦) 위의 긴장. 그렇듯 절도 있고 엄정한 시품(詩品)"이라며 시조의 정형률은 지켜내려 한다. 그 엄정한 시품을 곧이곧대로 지켜내려는 시집이 이씨의 '원에 관하여'다.

"몸을 낮추어야/속살 파헤쳐지는 것을//저렇듯 긴 이랑 땀방울로 적시기까지//쪼그려/앉은 그대로/뻗어 나가야 하는 것을"('호미'전문)

이씨는 이번 시조집에서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사물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직조해 낸 눈물 겹고 아름답고 아픈 것들의 의미를 천착하겠다"며 호미.괭이.낫.코뚜레.아궁이 등 민족에 친근한 것들을 다루고 있다. 위 '호미'와 같이 옆에서 수없이 바라보며 한땀 한땀 시화(詩化)시킨 그 사물들은 우리의 삶의 진실과 한에 직접 이어져 있다.

"더는/ 모날 수 없는/절정에 이르러서야//자못 둥글대로 둥근/저 붉고 아득한 둘레//온 누리/죄었다 풀고/풀었다가 되죄는"('강강술래'전문)

'풀었다 되죄는'긴장과 깊이, '내공'이 없으면 45자 내외의 단형시조는 그야말로 소품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시조의 묘미는 정형과 단형에 있음을 익히 알면서 두 시인은 끊임없는 실험과 천착으로 우리 시대에 살아있는 정형시로서 시조의 허리를 떠받치고 있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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