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졸깃한 세상 그림, 아내는 수준급 붓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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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배우 김선화(왼쪽)·만화가 박재동씨 부부는 각기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그림 그리기로 호흡을 맞춰왔다. 두 사람은 첫 부부전을 열며 새삼 서로의 그림 솜씨를 인정하게 됐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일간지 시사만평으로 이름났던 만화가 박재동(62·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씨는 요즘 ‘손바닥 그림’ 운동가로 변신했다. 어른 손바닥 크기 스케치북에 주변 사람들과 자질구레한 우리 일상을 뚝딱 그린다. 운전기사와 나눈 세상사, 어머니께 한 안부전화에서 나온 이야기, 시장 골목 선술집에서 젓가락 뚜드리며 한 설전(舌戰)까지 한 컷에 담긴 속내가 졸깃졸깃하다.

 거리와 공공장소로 손바닥 그림을 끌고 순회하던 박 교수가 오랜만에 전시장으로 돌아왔다. 4일부터 서울 평창 36길 금보성 아트센터에서 시작한 ‘손바닥 그림, 소소한 일상’ 전이다. 부제는 ‘박재동 교수, 배우 김선화 부부전’. 개인전이 아니라 부인 김선화(57)씨와 함께하는 2인 전이다. 1층은 남편 박 교수, 2층은 아내 김씨 작품이 빼곡하다. 부부의 인연으로 같이 늙어가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 다투던 안방을 떠나 각자의 작품을 들고 그림 대결을 벌인다.

 “선화씨가 보기보다 알뜰살뜰해요. 살림살이가 야무지고 시간 활용도 존경할 만하죠. 몇 년 전부터 화실을 드나드는 눈치더니 제법 그림이 좋아요.”(박재동)

 “워낙 밖으로 도는 사람이라 내 그림 봐 준 적은 없지만 응원은 해줬죠.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는데 이제 짬이 좀 나니 열심히 그려야죠. 아이들 다 키우고 여유가 생긴 주부들에게 유화 그리기를 강력 추천합니다.”(김선화)

 박재동 화백으로 돌아온 박 교수가 만나는 이마다 ‘잠깐’ 불러 세워 초상화를 그려주니 모두들 감동이다. 길거리, 전철 안, 음식점과 술자리, 노래방, 시장바닥 등 소시민이 가는 곳 모두가 그림 풍경이다. 시대의 자화상이자 풍속화인 셈이다. 박 화백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 시인은 그 뜻을 읽고는 ‘손바닥 그림은 꽃씨’라 했다. 그 작은 그림이 무럭무럭 커서 한국 사회의 거대한 그림판이 됐으면 싶은 마음에서 씨앗이라 했다 한다.

 “지난 10년 동안 그린 손바닥 그림이 2000점이 넘어요. 이렇게 많은 줄 몰랐는데 역시 꾸준함을 이길 건 세상에 없더군요. 제가 만나는 이마다 손바닥 그림을 권하는 이유입니다. 일기 대신 작은 수첩이나 스케치북에 몇 줄 선으로 인상깊었던 일들을 그려보세요.”(박재동)

 성격파 배우로 얼굴이 알려진 김선화씨는 이미 화단에서 솜씨를 인정받은 아마추어 화가다. 사실주의 풍경화에서 출발해 이제는 화가 자신의 개성이 물씬한 반추상화로 나아가는 중이다. 붓질이 이어질수록 변화하는 그림 맛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김씨는 투자한 만큼 실력이 느는 게 보여 뿌듯하다고 했다.

 “제가 요즘 지방 순회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로 무대에 서면서도 붓을 놓지 않아요. 이렇게 재미있는 걸 오래오래 즐기고 싶네요.”(김선화)

 박재동 김선화 부부전은 은퇴 뒤 늘어질 생활에 대해 걱정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스타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화제다. 자기다운 속도에 맞춰 다시 한 번 새 일, 새 취미, 새 길에 도전해보는 삶의 한 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부가 함께이니 시샘의 눈길을 받을 법하다.

 박재동 교수가 그림 한 장을 보여주며 “꿈이 이 정도는 돼야지” 하며 웃는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던 40대 박 화백은 그림 복판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사람들은 세계 미술의 중심을 뉴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라고 생각한다. 선 자체를 즐기자.’ 전시는 27일까지 이어진다. 전시장에서 운 좋게 박 교수를 만나면 초상화는 덤이다. 02-396-8744.

글=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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