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암만서] 박노해 시인 2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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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25일 오전 무잠마 바그다드를 갔습니다. 그곳은 요르단 암만의 시외버스 정류장의 이름으로 바그다드행 버스를 탈 수 있는 곳입니다.

전쟁 중인 조국을 지키겠다고 요르단에 살고 있던 이라크 청년들이 바그다드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바그다드는 물론 국경 부근도 폭격이 계속되고 있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지하드(聖戰)의 길을 떠나는 이라크 젊은이들.

출발 대기하고 있는 버스 안으로 들어서자 낯선 동양인에게 V자를 그리며 박수로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꼬레아(한국)에서 온 '꾸리'(코리안)라고 밝히자 분위기는 썰렁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오늘도 전쟁 반대에 나서고 있다, 나도 곧 바그다드로 들어가 미사일 폭격 아래 그대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에 엄지 손가락을 내밀며 따뜻한 웃음을 보냈습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버스 창문을 열고 마중 나온 가족들 손을 잡고, 서로 얼굴을 쓰다듬고, 시계를 바꿔 차고, 차에서 내려와 포옹을 했습니다. 피르하신이라는 청년의 형은 전장으로 가는 앳된 동생을 끌어안고 볼을 부비며 눈물을 글썽이고…. 너무도 애틋한 형제의 눈물에 그만 나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멀리 조국에서 무정한 이 동생을 위해 말없이 기도하고 계실 형을 생각했습니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나에게 형은 늘 어려웠고, 그래서 우리는 살가움보다는 '뜨거운 냉정함'이었습니다. 오랜 수배.감옥살이 끝에 석방되던 날, 사제단 의장 신부이던 형은 북한을 방문 중이었습니다.

형이 귀국하던 날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함께 방북한 신부님들과 걸어오던 형은 나를 보더니 한걸음에 달려와 와락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며 오열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번도 형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폭격이 불기둥을 이루는 전쟁터로 앳된 동생을 떠나 보내는 피르하신 형의 심정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차라리 자신이 갔으면 좋으련만,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동생을, 아들을, 형을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들, 글썽이는 눈동자를 깜박이며 말없이 담배만 피워대는 남은 사람들. 그들은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에게 연신 담배를 권하며 불을 붙여주었습니다.

나는 제일 나이어린 피르하신에게 바그다드로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피르하신은 눈물을 닦으며 나직하게, 점점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전쟁의 자식이다. 나는 사이렌 소리를 음악으로 들었고 수시로 떨어지는 미사일 틈에서 자랐다. 이제 외국에서 자리 잡고 살 만하니 또 전쟁이다. 전쟁이 내 인생이지만, 나는 부당한 침공에 굴복할 수 없다. "

아, 그 순간 나는 보았습니다. 이라크인의 두 얼굴을. 눈물 젖은 얼굴과 성난 눈의 얼굴을. 젊은 청년들의 눈물 속의 칼을, 칼 속의 눈물을. 비록 남루하지만 위엄 있고, 친절하지만 더 없이 단호한 이라크인의 두 얼굴을. 그리고 나는 여기 와서부터 내내 품고 있던 물음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라크를 쉽게 이길 수 없으리라고.

그들은 솔직히 말해 후세인이 좋아서 나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광신으로 전선에 나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분노이고, 뿌리 깊은 투혼이었습니다. 누구의 밑에서도 살 수 없고, 부당한 무기 앞에서는 결코 무릎 꿇지 않는 아랍인의 기질이 이들을 전쟁터로 나서게 한 것입니다. 저 찬연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한 이슬람 정신의 부름으로 나선 것이었습니다.

지금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전 아랍인들은 무섭게 단결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 세계 곳곳에서 반전 평화 운동의 어깨동무가 더 힘차게 출렁이고 있습니다. 여기 무잠마 바그다드에서는 폭격이 쏟아지는 바그다드로 떠나는 이라크 젊은이들의 행렬이 하루하루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전쟁도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군대는 사기를 먹고 산다고 합니다. 아무리 첨단무기로 바그다드를 폭격하고 아무리 많은 돈으로 주변국을 끌어들여도 사람이 꺾이지 않으면, 사람의 정신이 꺾이지 않으면, 미국이 아니라 그 무엇도 이를 꺾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인간의 순수, 인간의 위엄, 인간 정신의 소생을 보고 있습니다.

사진=나눔문화 네트워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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