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소·친미의 공식선언|이집트, 대소우호조약 폐기의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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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놔르·사다트」 「이집트」대통령에 의한 소애 우호협력조약의 파기는 「이집트」우선 주의를 표방해 온 「사다트」가 소련의 「냉담한 우호」에 크게 반발, 공식적으로 반소·친미선언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집트」와 소련의 관계는 당초부터 와해할 가능성을 안고 출발했다. 「이집트」가 소련에 접근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1955년 「나세르」대통령 생존시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력침공과 미영의 대「이스라엘」지원에 대한 깊은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1967년 중동전 때 미제「팬텀」기로 무장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함으로써 비동맹을 추구해온 「나세르」도 「이집트」의 생존과 독립을 위해 친소 좌경화를 더욱 굳혔다. 그러나 문제는 양국이 이념적으로 결속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소련의 입장으로서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중동에서 「헤게모니」투쟁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권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반면에 「이집트」는 소련의 군사적 지원뿐만 아니라 경제원조까지 기대, 「아랍」사회주의의 형성을 주도하는 한편 「이스라엘」과의 대결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잡으려 했었다 .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동기에서 이루어진 접근은 서로간의 국가이익의 극대화라는 측면에서 항상 가변적인 것이었으며 「나세르」를 계승한 「사다트」도 집권 초기에는 대소접근정책을 답습했으나 미·소 등 거리외교 노선으로 서서히 전환했다.
71년5월 「로저즈」미 국무장관의 「카이로」방문 직후 「이집트」는 소련과 군사원조를 골자로 하는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이집트」의 이익을 우선 시킨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이집트」가 필요한 공격용 무기를 제공치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 20억「달러」 에 이르는 부채상환을 독촉했다. 뿐만 아니라 부통령 「알리·사브리」, 전 국방상 「모하메드·마우지」중장 등 친소세력을 부추겨 「사다트」축출 「쿠데타」를 음모토록 하는 등 「사다트」와는 불화를 계속했다. 「사다트」는 대소 보복의 하나로 72년7월 「이집트」에 주재하던 소련 군사고문관 및 전문가 약 2만명을 축출해 버렸다.
이런 관계는 73년10월 제4차 중간전 승리이후 더욱 냉랭해졌다.
「키신처」의 주도에 다른 「시나이」협정에 「사다트」가 호응한 것에 불만을 품은 소련은 노후장비의 교체마저도 외면해 「이집트」의 국방력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번 「이집트」조치로 중동 및 「아프리카」에서 각축하는 미소 대결에서 미국이 일단 유리한 입장을 갖게됨을 뜻한다.
이 지역에서의 대소 견제력이 강화될 뿐만 아니라 지중해와 「수에즈」에서의 소 해군력 활동에 장애를 가져오며 「이스라엘」문제해결의 협상전망도 밝아질 수 있다.
한편 「이집트」의회의 외교위는 지난 15일 중공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양국의원 「레벨」 의 친선기구설치를 승인, 이번 조치의 정치적 의미를 더욱 뚜렷이 했다. 그러나 18년간 4차례나 「이집트」의 곤경을 구출해 준 소련으로서는 이번의 외교적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도 「시리아」 「리비아」 등 「아랍」강경세력에 대한 원조를 강화, 「아랍」사회의 분열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김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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