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체제의 내부갈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30년 동안 쌓이고 쌓인 북괴권력 구조의 내부모순이 최근에 와 급속히 표면화하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조짐은 6개년 계획의 실패로 집약된 북한 경제의 침체와, 후계자문제를 둘러싼 권력구조내부의 갈등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대화개시와 남북왕래를 통해 북괴는 생산·소비·공업기계설비·기술·제품·생활수준 등 모든 분야에 있어 한국이 월등히 우월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7·4공동성명에 합의한지 1년 만인 73년8월28일 북괴는 얼토당토않은 트집을 잡아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사보타지」했다.
그로부터 한달 만인 73년 9월에는 6개년 계획의 내용을 경제토대의 「현상유지」에서 『공업건설의 확대』방향으로 수정하고, 이른바 기업의 독립채산제를 도입함과 아울러 서구·일본과의 경제교류를 서두르기로 결정했다.
한국의 경제력을 뒤따라오기 위해서는 남북대화를 일단 「사보타지」하고서 일본·서구의 자본과 기술·「플랜트」를 도입할 필요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경영이니 원가계산이니 금리니 국제신용이니 하는 세계경제의 기본적인 「룰」에 숙달치 못한 북괴의 체질로써는 그것 역시 또 하나의 파탄만을 불러왔을 뿐이다.
그것은 74년 이후 누적된 북괴의 외채상환 불이행과 막대한 무역적자로 나타났다.
74년의 북괴무역적자는 5억「달러」, 대외채무는 17억「달러」여서 연간1억「달러」이상의 채무상환으로 쫓기고 있는데, 75년에 이르러서는 1억8천만 「달러」중 연체분이 1억「달러」나 된다고 한다.
이로 인해 6개년 계획을 위해 불가결했던 서방측과 일본으로부터의 원활한 자본·기술도입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한 북괴의 경제파국과 관련해, 남북을 다 같이 돌아본 「캐나다」의「마크·게인」특파원은『북한의 6개년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포항·울산의 남한공업시설은 그들보다 일세대나 앞서 있다』고 말한바 있다. 이와 같은 열세는 김일성을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고 그 초조감은 자신의 후계자로서의 김정일의 갑작스런 부상과 권력구조 내부의 세대갈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75년2월「공업 열성자 회의」란 것을 연 자리에서 이른바 『3대혁명「그룹」이란 새로운 친위세력을 조직하여 이를 기존 지휘계통의 테두리 밖에서 직접 조종하면서 『구세대간부의 보수주의와 경험주의·관료주의를 퇴치한다』고 공언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김은 현재 연로한 세대를 제쳐놓고 자기의 나어린 친자를 일약 대 비서국장으로 3단계 특진시키는가 하면, 당 중앙위를 실무골수분자로 대치하여 그로 하여금『3대혁명「그룹」』을 조종케 함으로써 구세대 거세작업을 서두르는 중이다.
이것은 일종의 친위 「쿠데타」의 한 사례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한 분위기 조성으로 김은 계속 김정일의 우상화를 도처에서 조작하는 한편 김 일가의 신격화를 강화해 세습권을 정당화하려는 술책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나 6개년 계획의 실패와 경제침체의 책임을 구세대의 보수주의운운에 뒤집어씌우려는 김부자의 정략이 언제까지나 순탄하게 진행되리란 보장은 없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북괴경제 자체에 별안간 숨구멍이 뚫릴 까닭은 절대로 없는 것이며, 김영주·김일을 중심으로 한 늙은 세대 역시 궁지에 몰리면 한번쯤은 반발하는 것이 상례기 때문이다.
결국 김일성 족벌독재는 내부로부터 곪아터지기 시작한 셈이며, 그것이 자유인의 비판 못지 않게「프랑스」등 서구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도 「사회봉건주의」란 비난을 받기 시작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우리로서는 오직 꾸준한 안보노력·경제건설·평화외교로써 자신을 갖고 저들의 경향에 대처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