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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넥스트 톱 모델' 한국서 찍자고 남편 졸랐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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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미국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인 ‘아메리카 넥스트 톱 모델’을 이끌고 있는 타이라 뱅크스(가운데). 2006년 시사주간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중앙포토]

재미동포 작가 이혜리씨는 올해 50대에 들어섰다.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갔던 그는 40여 년 전, 그러니까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돌리던 재봉틀 소리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마음에 영원히 각인(permanent memory)됐다고 했다.

 “어머니가 창고에서 ‘드리릭 드리릭’ 하던 소리를 잠결에서도 들었어요. 한국 부모님은 참 대단합니다. 자식들에게 모든 걸 희생하시죠. 주말에도 일하는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는 짜장면을 만드셨고….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고요.”

 26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서울예대 교정에서 이씨를 만났다. 봄기운이 물씬 오른 캠퍼스에는 젊음이 넘실댔다. 학생 10여 명이 탈춤을 연습하고 있었다. 이날 이곳 예장홀에선 각별한 행사가 열렸다. 세계적 오디션 프로그램인 ‘아메리카 넥스트 톱 모델(이하 ANTM)’ 21번째 시즌 예선전이 치러졌다. 진행은 수퍼모델 출신의 특급스타 타이라 뱅크스(41)가 맡았다.

재미동포 작가인 이혜리씨는 지난 20여 년 미국 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문화전도사로 활동해 왔다. “핏줄은 못 속이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매사 ‘빨리빨리’ 처리해 왔다”며 웃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스튜디오 보안은 엄격했다. 외부인의 출입이 전면 금지됐다. 녹화 전에 행사장을 슬쩍 훔쳐봤다. 무대 중앙 ‘SMIZE’ 전광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웃음(Smile with your eye)’이란 뜻으로, 타이라 뱅크스가 만들어 유명해진 단어다. 한글로 ‘강렬한 눈빛’ 다섯 글자도 빛나고 있었다. 패션 용어 ‘엣지있게’도 보였다.

 ANTM은 수퍼모델을 꿈꾸는 일반인의 열정을 담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시즌마다 나라를 바꿔가며 찍는다. 이번에 영화 ‘어벤져스 2’와 함께 ‘영화진흥위원회 외국 영상물 로케이션 인센티브’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오는 10월께 지구촌 100여 나라에 ‘문화한국’ 이미지를 심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씨는 ANTM 제작사 대표이자 프로듀서인 중국계 미국인 켄목의 아내다. 지난 수년간 ANTM을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뛰었다. 그가 태어난 한국을 좀 더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는 특히 1996년 6·25 때 북한에 아들을 두고 내려온 외할머니 백홍룡씨의 일생을 재구성한 소설 『할머니가 있는 풍경(원제 Still Life with Rice)』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올랐다. 책은 50만 부 가까이 팔리며 한국 현대사의 고단함을 새롭게 일깨웠다.

 - 첫 소설 발표 후 한국문화 전파에 주력해 왔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자기정체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외국에서 살면 사정이 다르다. 어려서부터 ‘나는 왜 주변 사람과 다르지, 우리 가족은 어디에서 왔지’ 하는 갈등을 겪게 된다. 대학(UCLA 정치학) 졸업 후 외할머니의 힘겨웠던 일생과 마주치게 됐다. ‘북에 남아 있는 아들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하는 할머니의 소망을 이뤄주려고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왔다.”

 - 2002년 두 번째 작품 『태양 없는 곳에서(원제 In the Absence of Sun)』를 냈다.

 “첫 소설 이후 북한에 있는 친척들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97년 중국·북한 접경지역까지 직접 가서 외삼촌(이용운)을 비롯해 친척 아홉 명을 탈출시킬 수 있었다. 매수도 하고, 협박도 당하고, 온갖 난관이 있었다. 그 실제 이야기다. 한 편의 007 영화 같았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이산가족·탈북자의 고통을 전하기도 했다. 두 번째 작품은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았다. 꼭 출간됐으면 한다.”

 - 이번에 외삼촌을 만났나.

 “그렇다. 가족 모두 서울에 정착했다.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지금은 여유롭게 지내고 있다. 외삼촌은 올해 일흔아홉, 제 아버지와 동갑인데 북한에서 고생을 많이 한 까닭인지 한 세대는 늙어 보였다.”

 - 2002년 미 상원청문회에도 섰다.

 “당시 케네디 상원의원이 내 책을 읽고 탈북자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의 책임을 강조했다. 내 일생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 시간을 멈추고 싶을 정도다. 부모님도 함께 갔었다. 부모님께서 ‘이민 온 걸 처음으로 잘한 것 같다’고 하셨다. 제가 너무 미국식으로 성장해 이민 왔던 걸 후회하셨던 모양이다.”

 - 탈북자 돕기를 계속할 것인가.

 “무엇보다 굶주린 아이들을 먹여야 한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으면 정신건강도 무너진다. 생존이 급선무다. 시간과 돈이 허락하면 보육시설이나 여학교를 꼭 세우고 싶다. 키워드는 교육이다. 그래야 미래를 열 수 있다.”

 이씨는 한국문화 전도사를 자임해 왔다. ANTM의 한국 유치도 크게 보면 그 연장선에 있다. 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글로벌 시민의 출발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같은 동양인으로서 인종차별을 겪었던 그와 남편의 뜻이 통하는 대목이라고 했다. 21일 촬영을 시작한 수퍼모델 도전자들은 다음 주까지 경복궁·광화문·청계천·광장시장·신촌·동대문 등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체험하게 된다.

 - 어떤 사람들이 주로 지원하나.

 “예전 시즌과 비슷하다. 어렵게 큰 아이들이 많다. 해외여행 경험이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 비행기를 처음 타봤을 것이다.”

 - 제작자인 남편을 설득했다고 들었다.

 “마흔 넘어 남편을 만났다. 결혼 6년째다. 수년 전부터 ‘한국에서 찍자’고 속삭여 왔다. 제가, 제 부모가 태어난 곳이니까. 세계에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구촌이 한 식구인 시대다. 남을 모르면 평화도 기약할 수 없다. 네 살 난 쌍둥이를 뒀는데, 그 애들은 나와 또 달리 한국계·중국계 미국인이란 3중의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세상의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내려면 서로 다르게 커 온 환경부터 알아야 한다.”

 - 타이라도 한국행에 동의했나.

 “그건 타이라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나(웃음). 그는 프로그램 초창기부터 남편과 함께 일해 왔다.”

 - 한국의 무엇을 보여주나.

 “비밀사항이다. 내가 실무진도 아니고…. 지금까지 ANTM 제작진은 촬영 장소를 제공해 준 나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해 왔다. 부정적인 측면은 노출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 최고의 모습이 소개되지 않을까 한다.”

 - 유튜브 동영상을 보니 지난해 타이라가 한복을 입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세배도 하던데….

 “어머니가 평소 입었던 옷이다. 그래서 치마도 저고리도 모두 짧아 보인다. 우리 언니 집에서 찍은 비디오다. 동영상에서 타이라가 말하듯 ‘멜팅 포트(melting pot·인종 용광로)’이다. 평소 우리 집도 이웃에 개방한다.”

 - 어떤 방식인가.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이랄까. 설날이나 추석, 혹은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에 현관문을 열어놓는다. 한국 음식과 중국 음식을 차려놓고 누구든지 와서 함께 먹으라고 한다. 집이 없는 사람들도 초대한다. 우리 문화를 널리 전하고 싶은 뜻에서다. 그게 작가로서, 엄마로서, 교육자로서 나의 미션이다.”

 - 미국 교사들에게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KAFE(Korea Academy for Educators)도 세웠다.

 “올해로 10년째다. 역사·음식·예술 등 한국의 모든 것을 1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교육한다. 지금까지 미국 전역에서 3000여 명이 다녀갔다. 그들이 나중에 제 아이들도 가르치지 않을까. 또 이번 학기부터 서울예대 LA 허브 디렉터로 일하게 됐다. 한국 인턴 대학생들에게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산업현장을 제대로 익히게 할 작정이다. 문화는 항상 교류해야 하니까.”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ANTM 한국선 누가 나올까

‘아메리카 넥스트 톱 모델(ANTM)’은 장수 프로그램이다. 2003년 시작해 지금까지 시즌20을 마쳤다. 지난 11년간 총 257편이 방영됐다. 최근 인기가 조금 시들해졌으나 미국에서 시즌당 400만~500만 명의 시청자를 불러들였다. 2011~2012년에는 30초당 광고료가 6만1315달러(약 6600만원)에 달하기도 했다. ANTM은 의류·액세서리 등 프랜차이즈 브랜드 사업에도 진출했다. 지난 모든 시즌을 진행해 온 타이라 뱅크스는 프로그램 인기에 힘입어 2005년 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 프로그램 ‘타이라 쇼’를 선보이기도 했다.

 한국으로 무대를 옮긴 시즌21에 한국 디자이너와 모델들이 참여할지도 관심사다. 제작진은 극비사항에 부치고 있지만 걸그룹 2NE1과 배우 황신혜의 딸인 모델 이진, 밴드 로열 파이럿츠의 제임스 등이 출연할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그램 공식 페이스북과 홈페이지에 경복궁 앞에서 포즈를 취한 제임스의 사진이 게재됐다. 2NE1은 파이널 무대에 초청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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