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커버스토리] 파릇파릇 돋는 봄, 입맛도 돋네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쑥부쟁이가 지리산의 봄을 알린다. 조선호텔 조형학 총주방장(왼쪽)이 전남 구례 지리산 자락에 있는 고영문·최문희 부부의 쑥부쟁이 밭을 찾았다.

봄이다. 싱그러운 맛의 계절이다. 들에는 땅기운을 품은 쑥부쟁이·쑥·두릅·고사리·취나물이 돋아나고, 바다에선 도다리 살이 오르고 주꾸미 알이 찬다. 봄이 오면 서울 특급호텔 셰프들은 주방을 박차고 나온다. 봄바람에 취해서가 아니다. ‘봄 식재료 전쟁’에 나서는 것이다.

요리의 8할은 재료 맛이라고 한다. 더 맛있고, 더 신선하고, 더 새로운 먹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곧 맛의 경쟁력이다. 특급호텔은 식재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봄이 오면 식재료 원정대를 꾸린다. 셰프와 식재료 구매팀으로 구성된 TF가 최고의 맛을 발굴하기 위해 방방곡곡을 헤집고 다닌다.

식재료 여행은 생각처럼 고상하지 않다.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다. 전국 재래시장과 갯마을 경매장을 찾아가 ‘죽치고’ 기다리는 건 다반사다. 지나가던 등산객에게 건네 들은 산나물 맛이나, 갯바위 어부에게서 얻어먹은 생선회 한 점이 특급호텔 만찬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특급호텔은 각 호텔만의 노하우를 쌓아왔다. 그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week&이 처음 공개한다. 특급호텔의 식재료 네트워크는 흥미로웠다. 호텔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11년째 거래하는 곳이 따로 있었다.

제철 맞은 뭍과 바다의 봄 식재료들. 왼쪽부터 토란·쑥부쟁이·도라지·전복·주꾸미·방어.

이를테면 롯데호텔서울은 강원도 강릉 수협 중매인 37번에게서 털게를 수급한다. 달포마다 경남 사천의 삼천포항과 강릉 주문진항에서 직접 배를 띄우기도 한다. 최신 문명을 활용하는 호텔도 있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는 수시로 모바일 경매에 참여한다. 경남 통영 경매인에게서 그날 경매에 올라온 해산물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전송받아 상태를 확인한 뒤 구입을 결정한다. 산지 상회와 직거래를 트는 것도 방법이다. 더 플라자는 전남 광양 청아수산에서 강굴을, 전북 군산 운명수산에서 주꾸미를 들여온다.

최근 전 세계 미식 트렌드는 푸드 마일리지(Food Mileage)를 엄격히 따진다. 식품 생산에서 소비까지 소요된 거리가 짧을수록 좋은 식품으로 친다. 그만큼 신선한 재료를 중시한다. ‘Zero Mileage Food(마일리지가 0인 음식)’라는 용어도 여기서 나왔다.

웨스틴 조선호텔 조형학 총주방장은 “식재료도 물을 건너와야 최고로 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안전한 우리 식재료를 양식이나 중식에 접목하는 게 트렌드”라고 말했다. 서울신라호텔 아리아케 이태영 책임주방장도 “최고의 맛은 생산과 유통에서 시작되고 요리로 마무리된다”며 “건강한 식재료를 찾아 손님 앞에 내놓는 전 과정을 셰프가 진두지휘한다”고 강조했다.

특급호텔의 봄철 식재료 여행을 week&이 따라다녔다. 대한민국 최고 식재료가 거기에 있었다.

아낙네들이 파릇파릇하게 돋은 쑥부쟁이를 캐고 있다.

구례 산나물 향 살아있네 … 완도 활어 육질 끝내주네
특급호텔, 별미 식재료 찾아 삼만리

전국의 특산물 산지에서는 “귀한 식재료는 서울 특급호텔로 올라간다”고 입을 모은다. 특급호텔도 스스로 전국 별미만 모아 손님에게 내놓는다고 자랑한다. 그렇다면 호텔마다 식재료를 공급받는 경로 끝에 최고의 맛이 있다는 얘기다. 특급호텔과 함께 산과 바다로 식재료 여행을 떠났다. 산나물을 구하러 조선호텔과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갔고, 봄 해산물을 맛보러 신라호텔과 전남 완도 경매장을 찾아갔다.

구례오일장을 찾은 조선호텔 조형학 총주방장.

지리산에서 캐는 봄의 맛

지난 13~14일 전남 구례에는 100㎜가 넘는 비가 쏟아졌다. 지리산 산나물을 찾으려고 웨스틴 조선호텔 조형학(49) 총주방장과 구례를 찾은 날이었다. 그치지 않는 비가 야속했다. 그러나 산나물을 캐는 아낙들은 이맘때쯤 내리는 비는 억만금 주고도 못 산다고 했다. 나물을 살찌우는 단비를 탓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조선호텔 조리팀과 식재료 구매팀은 산나물을 찾으러 여러 해 동안 강원도 정선과 평창, 경북 울릉도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 다음 후보가 구례였다. 지리산 등산객으로부터 구례 나물 맛을 익히 들은 터였다. 조선호텔 식재료 구매팀은 구례군 소속 1100개 농가를 관리하는 구례군농업기술센터를 찾아가 산나물을 맛봤다.

특별했다. 한 뙈기 땅이라도 더 일구기 위한 농부의 땀이 깃든 맛이었다. 잔뿌리 없이 곧게 자란 도라지는 향이 진했고, 취나물 잎은 도톰하고 윤기가 흘렀다. 달래는 잎이 길고 알이 튼실했다. 생김새·색·향에 모자람이 없었다. 조선호텔은 2012년 구례 자연산 건나물 선물세트를 제작했고 개당 35만원인 나물세트 200박스를 ‘완판’했다.

조선호텔이 매달 사들이는 식재료는 15억원어치다. 1년간 사용하는 식재료는 3800여 가지에 이르고, 매일 호텔로 들어오는 식재료 양만 1t트럭 서너 대 분량에 달한다. 봄기운이 짙어질수록 트럭에서 산나물이 차지하는 공간은 더 넓어진다.

조 주방장은 양식 전문이다. 2010년부터 조리팀 150여 명을 총괄했다. 조 주방장은 매달 한두 번씩 식재료 여행을 떠난다. “우리 식재료를 메뉴로 만드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우리 땅에서 자란 식재료로도 양식의 맛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말린 쑥부쟁이와 쑥부쟁이돌솥밥.

로컬 재료 산나물은 조선호텔에서 여러 국적의 음식으로 변주됐다. 봄나물 비빔밥, 두릅튀김, 봄동 겉절이, 냉이 된장무침 등 한식뿐 아니라 봄나물 해산물 짬뽕이나 냉이페스토파스타 등 중식이나 양식에도 활용됐다.

조 주방장과 함께 찾은 구례오일장은 푸릇푸릇했다. 좌판 위에 하우스에서 난 쑥과 씀바귀가 한 바구니였다. 노점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에게 들에서 난 것은 없느냐고 물으니 나물 하나를 가리켰다. “거 있잖여.” 손가락보다 짧은 잎이 달린 쑥부쟁이였다. 구례에선 ‘쑤꾸재미’라고 한다. 지리산을 끼고 사는 사람들은 언 땅을 헤치고 가장 먼저 나오는 쑥부쟁이를 뜯어 보릿고개를 났다. 이어 쑥·두릅·씀바귀가 차례차례 밥상에 올랐다.

쑥부쟁이는 쑥갓하고 비슷한 모양새지만 향과 맛이 다르다. 생나물로 무치면 시금치 같고 밥에 넣고 찌면 맛과 질감이 곤드레와 비슷하다. 구례군농업기술센터 정연권(58) 소장이 지리산 산나물 자랑을 늘어놨다. “지리산 나물은 맛과 향이 살아있습니다. 노지에서 자란 자연산이기 때문입니다.”

구례군에는 쑥부쟁이를 공동 경작하는 지리산나물힐링협동조합이 있다. 귀농인 13명이 990㎡(약 300평) 밭을 일군다. 올해 쑥부쟁이가 농촌진흥청 지역농업특성화사업 품목으로 채택되면서 재배가 활성화됐다. 고영문(49)·최문희(47) 부부도 조합원이다. 구례군 토지면 파도리에 부부의 일터인 쑥부쟁이 밭이 있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지리산 중턱의 다랭이밭이다.

고씨는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쓰지 않는 유기농법을 고수한다”며 “친환경 퇴비만 뿌려도 나물이 쑥쑥 큰다”고 말했다. 쑥부쟁이의 여린 잎을 뜯어 먹어봤다. 쌉싸래한 나무향이 났다. 부부의 밭에서 난 쑥부쟁이는 현재 조선호텔 뷔페식당 ‘아리아’ 나물 코너에 생나물 무침으로 변신해 있다.

지리산 봄나물 사려면=지리산자연밥상(jirisanshop.com)은 지리산나물힐링협동조합 조합원인 고영문·최문희 부부가 운영하는 지리산 농산물 판매처다. 부부가 직접 기른 나물과 건나물, 장아찌를 살 수 있다. 가을마다 단풍축제가 열리는 피아골에 있다. 지난 21일 기준 쑥부쟁이 생나물 1㎏ 1만8000원. 전남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36-12. 061-781-1471.

서울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케’ 이태영 책임주방장(왼쪽)이 전남 완도로 향했다. 신라호텔은 완도수협 지민권 경매인을 통해 참돔을 공급받고 있다.

다도해 바다에서 길어올린 봄

갯바람이 훈훈했다. 자동차로 다섯 시간을 달려 한반도 남서쪽 끝자락 전남 완도에 다다랐다. 단단히 여몄던 옷깃을 풀었다. 긴장을 늦추니 허기가 들었다. 이번엔 바다를 맛볼 차례였다. 서울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케’의 이태영(50) 책임주방장과 바다 식재료를 찾아 18~19일 완도에 머물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활어 경매장이 바로 완도에 있다. 살아 있는 생선이 가장 많이 모이는 어시장이다. 완도수협위판장에서는 활어만 한 해 150억~200억원어치가 거래된다. 산지 경매장 중 최대 규모인 부산공동어시장은 거래액이 3400억원에 달하지만 죽은 생선인 선어와 패류만 다룬다.

1994년부터 아리아케를 지키고 있는 이 주방장은 2003년 바다 식재료를 찾기 위해 반년간 전국의 주요 포구를 샅샅이 뒤졌다. 그는 완도에서 쾌재를 불렀다. “요리사 사이에서 무명에 가까웠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완도산 돔·광어·우럭·삼치는 국내 최고라 할 만했습니다. 완도 앞바다는 해안선이 복잡해 조류(潮流)의 속도가 빨랐다 느렸다 반복합니다. 그래서 생선의 육질이 차지고 맛있습니다.”

그가 최고의 바다 식재료를 발굴했다는 완도수협위판장으로 향했다. 동 트기 전 경매장 안은 휑했다. 컴컴한 새벽에 경매를 치르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완도에서는 오전 5시에 조업을 나간 배들이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그날 잡은 생선을 거래한다.

(1) 완도수협위판장의 경매 현장. (2) 조업을 나갔다가 항구로 들어오는 어선. (3) 신라호텔이 자체 제작한 물차.

날이 점점 밝아오자 제철 맞은 해산물이 경매장을 한 가득 채웠다. 구경 나온 여행자도 제법 눈에 띄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생선 중 하나인 참돔이 나왔다. 참돔은 5~6월 산란을 앞두고 3~4월 한껏 물이 오른다. 도다리도 빠지지 않았다. 연안에서 산란을 마치고 점점 살을 찌우는 도다리는 봄기운이 짙어질수록 맛이 난다. 머리에 한 가득 알을 품은 주꾸미, 손 한 뼘을 훌쩍 넘길 만큼 자란 개불, 향긋한 새조개와 멍게도 보였다. 봄의 활기가 넘실댔다.

이 주방장은 완도에서 처음 참돔을 맛봤을 때 완도 참돔의 가치를 알아봤다. 문제는 유통이었다. 완도는 멀고도 멀었다. 물차로 이동한 생선은 선도가 떨어졌다. 그동안 완도 활어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원인이기도 했다. 신라호텔은 묘수를 짜냈다. 네모난 플라스틱 바구니를 칸막이로 나누고, 칸마다 참돔을 한 마리씩 책처럼 꽂은 뒤 물차 수조에 넣었다. 생선끼리 부딪히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수조가 달린 물차도 직접 제작했다. 적정한 수온과 산소 비율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번 실험을 거쳤다.

신라호텔은 11년째 완도산 참돔과 광어를 고집하고 있다. 참돔과 광어를 각각 15마리씩 실은 물차가 주 2회 경매장과 호텔을 왕복한다. 요즘은 도다리도 한 마리씩 끼어 있다. 도다리쑥국을 찾는 고객을 위해서다.

 경매는 오전 8시 시작됐다. 삐이익. 경매사가 호루라기를 길게 불어 흩어진 경매인을 모았다. 서늘한 긴장감이 돌았다. 경매인 30여 명이 펄떡펄떡 뛰는 생선을 두고 승부를 겨뤘다. 빨간 모자를 쓴 경매인들이 아크릴판에 입찰가를 적어냈다. 단 한 번의 수로 승패가 결정됐다.

경매인 번호 13번을 단 지민권(54) 사장. 20년 경력의 중매인인 그는 신라호텔과 11년째 거래 중이었다. “그물을 쓰지 않고 낚시로만 잡아 올린 자연산 참돔을 선별합니다. 맛과 질감은 2.5㎏ 정도인 것이 최고입니다.” 맛을 향한 요리사와 중매인의 집념이라 부를 만했다.

완도 해산물 사려면=완도금일수협유통센터 1층에서 매일 오전 8시, 오후 2시 두 차례 완도수산물경매가 열린다. 경매는 보통 1시간30분 정도 진행된다. 일반인은 경매에 참여할 수 없지만 경매가 끝나면 경매인에게서 수산물을 살 수 있다. 지난 19일 경매인으로부터 참돔 1㎏에 3만원, 주꾸미 1㎏에 3만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전남 완도군 완도읍 가용리 1100-1. 061-554-2172.

글=양보라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