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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1518)|등산 50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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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원의 대교향락>
관모고원의 등반은 아우성치는 강풍과 천지간에 대하흐르듯 하는 무시무시한 눈보라를 헤쳐가는 영하15도속 고난의 장정. 짐꾼 김·임씨를 교대로 한사람씩 데리고 나섰으나 봉 하나 넘기가 무섭게 죽는다고 우는 소리를 해서 되돌려 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때로는 동해와 반대편 백두산쪽에서 흘러드는 운무·운해가 관모연산에서 맞부딪치는데 이 기묘하고 환상적인 조화의 속을 누비는 장쾌한 경우도 있었다.
입산 5일째되는 날 김·임씨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나는 그때까지 동계등반이 없었던 북설령 (해발2,442m)을 향해 단독등반에 나섰다. 몸을 날려 내릴 듯 하는 맞바람을 뚫고 한나절이나 걸려 도달한 북설령정상 일대는 뜻밖에 비행장같이 광활한 벌판이었다. 일견 멋없는 광경에. 사뭇 맥이 빠졌지만 서쪽으로 5백리쯤 되는 아득한 곳에 내 생전 처음대하는 백두산의 장엄한 모습이 신비롭게 떠올라 나는 엄청난 감격으로 목이 메었다.
밋밋이 솟은 암갈색의 천리천평수해를 산자락으로 하고 그 위에 두툼하게 의젓이 솟아 있는 이 청초한 은백의 봉두는 거창하고 성스러웠다.
그야말로 순례자가 천신 고행끝에 성지를 첫눈에 찬 감격이라고나 할까-.
이토록 북설령은 높은 벌판위에 백두산의 신비경과 어울려 절묘한 산악미를 구성하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관모봉련산은 그만큼 높이 올라야만 참모습을 알수있는 한국적인 「알프스」라는 것을 수긍하게 되었다.
이날 하산길에 북하서산막(12명정도 수용의 크기)에서 수렵인 일행을 만났다. 총가진수렵인 2명, 몰이꾼 4명과 사냥개 3마리였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황봉송 (40세가량) 은 장대한 기골의 사나이로서 일본 각 대학의 등반대를 「리드」해준 적이 있다면서 입석산 바위벼랑에서 잡은 큰 산양두마리를 삶고 굽고해서 심산에서 생각지도 않던 산양고기 「파티」를 베풀었다.
조금 쾨쾨한 냄새가 났으나 구수한 맛이었다. 내가 내놓은 과일통조림과 과자도 씹으며 우리는 밤새는줄 모르고 산얘기·수렵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나남과 주을온보 두곳에서 사는 유명한 수렵인인 백계노인 「양코프스키」 밑에 있는 수렵 「리더」였다. 관모봉에서는 곰·산돼지·산양을 사냥하고 있는데 백두산쪽에는 사향노루와 호랑이가 많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황씨일행은 서하서로 출렵하고 우리는 보상동으로 하산케되어 정든 그들과 헤어졌다. 나는 황씨 얘기에 이끌려 관모봉 북동아래 주을온천지에사는 「양코프스키」를 방문했다. 빨간 벽돌의 온천「호텔」가까이 그림같이 모양 있는 토막나무산장에 「양코프스키」 일가가 살고있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금방 뛰어나올듯한 뿔달린 사향노루와 거호의 머리박제가 벽에 장치되어있었고 호랑이 모피가 깔린 방정면에 통나무가 활활타는 육중한 「페치카」가 있었다. 밝은 방에 그림과 총·곤충표본·서적들이 질서있게 정리되어 있었고 「양코프스키」는 「러시아」풍의 안락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수없는 사선을 넘은 관록이 역연, 늠름한 체구에 범상치 않은 60세 안팎의 그는 「파이프」연기와 더불어 일본말·우리말을 섞어가며 즐겨 많은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얼마전 철망으로된 수렵무장을 하고 백두산근처 바위산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다 총에 상한 호랑이와 격투, 앞발에 할퀴어 등을 부상했다며 회복기에 있지만 약간 수척해 보였다. 「러시아」 장교였던 그는 공산혁명을 피해 이곳에서 망명생활중. 백두산등 북한고산뿐 아니라 노·만대륙의 소흥안령산맥을 넘나들면서 수렵생활을 하고 있었다.
값나가는 거호와 사향노루를 쫓아 몇달씩 산맥과 산맥을 넘어다니고 백두산 같은 깊은 산에서는 가끔 산적·마적들과 마주쳐 생사를 건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맹수사냥뿐 아니라 희귀·신종의 곤충·식물등을 채집, 생물학계에도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그립다면서 독한 「보드카」주와 차대접을 하고 파란눈에 아름다운 금발의 딸과 20대의 멋있는 아들도 소개해 주었다.
이렇듯 나의 관모봉등반은 산과 바람과 눈보라의 대교향악 같은 산행이었으며 북녘의 이국수렵인의 가정에서 생소하고 멋있는 생활을 견학하기도 한 별나게 인상깊은 산행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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