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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1515)|등산50년(48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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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적막한 신비경>
우리가 설악산을 가게된 또 하나의 이유는 마침 그때 철도가 외금강에서 남으로 연장, 양양까지 개봉되었기 때문이다. 금강의 그늘에 가려 소박받던 설악이 철도의 가설로 외부세계와 다소 가까워진 것이다.
일행은 언제나 변함없이 뜻과 손이 맞는 엄흥섭과 또 한사람 새로이 기맥상통한 방현동지가) 합세, 세사람이었다. 방현은 「세브란스」의전생으로 산악부 「캡틴」이었는데 귀공자「타입」의 「모던·보이」로 매우 명랑한 성격이었다.
밤 열차로 서울을 떠나 안준·외금강을 지나 1월2일 (39년)낮 가역사 하나가 덩그러니 서있는 속초에 내렸다. 썰렁한 철둑에 내려선 여객이라고는 우리 세사람이 전부였다. 짐을 챙기고있는데 일인 경관이 나타나 불심검문, 파출소까지 끌려갔다. 그는 조사후 의심될 점이 없자 『설악산에는 가끔 불순분자가 잠적하고 있으니 주의하고 나중에 등산결과를 꼭 보고하라』고 다짐하며 마을에 있는 주막으로 안내해줬다.
그때의 속초는 등대와 소나무들이 무성한 언덕을 중심으로 한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했으며 바닷가 호수와 깨끗한 청송의 숲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여기서 올려다본 설악은 깊고 드높게 시원한 곡선으로 굽이쳐 있어 금강의 속을 드러낸 아기자기함과는 대조적으로 의젓한 모습이었다. 그윽하고 기품있는 산이라는 것이 첫 인상이었다.
1일분의 식량등으로 각자의 「륙색」은 8∼9관이나 되어 우리는 휘청거리면서 설악의 품으로 기어들었다. 거쳐들어간 길은 지금의 찻길이 아니라 앞산 고가를 넘어 국민학교 분교가 있는 꼴짜기에서 설악동으로 들어선 것 같다. 어둑어둑해 질때 그 근처 단 한채있는 초가를 발견, 잠잘 곳을 청했다. 이집 위로는 사찰외엔 집이 없었으니 지금의 설악거리는 무인지경의 심심산골 이었던 시절이다. 초막집주인 김씨는 막 30대에 들어선 산꾼으로 설악산을 자기의 삶의 터전으로 삼고있어 우리의 좋은 안내자가 되었다.
그는 설악에는 산신령의 종자인 호랑이가 많아 입산때는 반드시 목욕 재계하고 한동안 육·파·마늘등 미식을 멀리할 것이며, 축수기도와 부정을 타지 않도록 하는등 엄격한 계율을 지켜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밤새도록 설악에 관해 신바람이 나서 얘기하다가 우리가 암등을 한다고 하자 벽에 걸린 약30발 길이의 투박한 삼(마)밧줄을 가리키며 그 밧줄을 타고 아무리 깎아지른 험한 수백척의 바위벼랑이라도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비호처럼 난다고 자랑했다. 우리는 그가 신기에 가까운 암등술을 지녔나 보다하고 잔뜩 호기심이 발동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바위벼랑에 붙은 버섯을 딸때 그 밧줄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튿날아침 우리는 이 설악의 터줏대감 김씨와 함께 일찌감치 동행에 나섰다.
전날밤부터 사납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여전히 기승을 떨었다. 그래서 사방이 어수선했다. 이 때문에 잠깐 둘러본 신전사가 우중충하고 답답하게 보였으며 울산암의 거대한 석벽조차 등반욕을 충동시킬 정도로 눈을 끌지 못했다. 한창 금강산에 매료되어 있을때라 아마도 비교가 되어 대수롭잖게 여겨졌던 것 같다.
정고평을 건너서 마등령길을 올랐다. 눈은 발목정도에 불과, 「스키」가 거추장스런 짐만 되었다. 지리한 오름길이었다. 그래서 경치가 어떤지 마음놓고 볼 겨를도 없었고 다만 휴식중에 습관처럼 설계나 바위벽을 더듬어봤으나 서울이나 금강처럼 홀랑벗은 바위와 설벽은 보이지 않고 천불동연봉마다 거무스름하게 나무가 나있어 시원치 못했다.
오를수록 눈이 깊어져 무릎까지 빠지고 잡목까지 무성, 전진이 힘들었는데 마등령에 올라서자 바람도 멎고 사방이 훤히 틔어 아래를 내려다 볼수도 있었다. 구름안개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속에 하얗고 탐스런 눈에 덮인 이 높은 영마루에서 비로소 산에 온듯 이끌렸다. 날카롭게 솟은 연봉들이 마치 우유빛 「커튼」과 같은 뽀얀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나의 눈을 애타게 만들었다.
설악은 금강에 비하여 여성적이라는 말이 수긍될 정도로 신비로운 아름다움이었고 참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워하는 처녀의 품속에 들어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키」로 달려 어두울 무렵 오세암에 닿았다. 남향의 법당을 중심으로 우측에 길다란 승방이, 좌측 비탈의 나무계단위엔 경판을 보관한 장경고가 있었다. 법당 좌측벽엔 국보급인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이 걸려 있었다. 이 모든것은 6·25때 불타 없어진 것들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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