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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 리포트] 로봇도 비행기도 증기기관인 세계…스팀펑크 속으로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 스팀펑크 스타일의 디자인을 선보이는 그리스 출신 디자이너 그룹 ‘펄사 프로젝트’가 만든 수제 오토바이 ‘키메라’.

만화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마법사 하울은 고철 덩어리 성에 삽니다. 위로는 증기가 나오고 밑으로는 다리가 4개 있어 스스로 움직이죠. 실제로 있다면 살아보고 싶을 정도로 신기한 성이에요. 이야기 속 발명품이 실제로 만들어진 경우도 있어요. 쥘 베른 소설『해저 2만 리』속에 나오는 잠수함 노틸러스호예요. 잠수함은 당시 과학기술로는 만들 수 없는, 상상 속의 발명품이었거든요. 이 둘의 공통점은 공상과학 문학에 나온 상상 속 발명품이라는 거예요. ‘스팀펑크(steampunk)’는 공상과학 문학을 뜻합니다. 이 세계를 알아보겠습니다.

2 주목할만한 스팀펑크 예술가인 야스히토 우다가와의 ‘천공성-하늘을 나는 거대 도시’. 강도 높은 제조 과정을 요구하는 세심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1901)는 산업혁명의 경제발전이 최고조에 달해 영국의 황금기라 불리던 때다. 당시 산업발전이 이뤄낸 최고의 기술은 바로 증기기관.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증기기관차처럼, 증기가 지닌 열에너지를 기계적으로 변환시킨 원동기를 말한다.

그럼 우리가 사는 현재, 혹은 미래가 증기기관 위주로 발전했다고 상상하면 어떨까. 스팀펑크는 이런 상상에서 시작된 예술이다. 가장 먼저 이런 상상을 한 사람은 19세기의 소설가들이다. 쥘 베른의『해저 2만 리』와 H.G. 웰스의『타임머신』이 대표적인 예다. 잠수함과 타임머신 등 기계 장치를 이용한 상상 속 발명품을 소설 속에서 탄생시켰다. 이 두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돼 스팀펑크를 대표하는 영화로도 꼽히고 있다.

스팀펑크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 역시 공상과학소설가다. K.W.지터는 새롭게 탄생하는 공상과학 문학을 ‘스팀펑크’라 부르기 시작하고 이 문학의 탄생을 언급한 편지를 출판사에 보냈다. 스팀은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증기기관의 ‘스팀’에서, 펑크는 현대사회의 주류에 편승하지 않는 아웃사이더를 지칭하는 ‘펑크’에서 따온 말이다.

3 이번 ‘스팀펑크아트전’의 총감독을 맡은 아트 도노반의 ‘시바 만달라’. 불교 철학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12시 방향은 시간, 3시는 탄생과 삶, 6시는 죽음, 9시는 윤회와 재생을 의미한다.

과거의 사람들이 미래를 상상하며 스팀펑크를 시도했다면, 현대의 사람들은 과거를 상상하며 스팀펑크에 접근한다. 상상의 무대 역시 빅토리아 시대다. 정원을 가꾸고 차를 즐겨 마시던 전통적인 영국의 모습과 강철로 만든 기계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산업혁명의 불길이 공존하던 격동의 시기다. 스팀펑크 영화로 알려진 '젠틀맨리그(원작만화『이상한 신사들의 리그』)' 역시 고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빅토리아 시대로 불러들였다. 노틸러스호의 네모 선장(쥘 베른『해저 2만 리』)과 지킬 박사(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지킬 박사와 하이드』), 그리고 투명인간 로드니 스키너(H.G.웰스『투명인간』) 등이다. 스팀펑크 작품들이 SF적인 동시에 복고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다.

홍콩 출신의 작가 제임스 잉의 일러스트 '열쇠 지기(2010)'도 SF적이면서 복고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만화영화의 한 장면을 따온 것 같은 아기자기한 그림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그림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제국에 열쇠 지기가 살았다. 열쇠 지기와 그의 애완 고양이는 제국의 지하 감옥 열쇠와 자물쇠를 관리했다. 그런데 열쇠 지기가 죽자 고양이를 제외하고는 열쇠와 자물쇠의 짝을 맞출 수 없게 됐다. 심지어 고양이들은 주인 없이 일하는 것을 거부한다. 결국 한 발명가가 증기엔진을 이용해 죽은 열쇠 지기의 유골을 움직이도록 만든다. 기계로 부활시킨 열쇠 지기가 열쇠와 자물쇠를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실제 증기기관차에서 들리는 벨 소리와 기적 소리를 재현한 ‘한국 부라스’의 모형 증기기관차.

제임스 잉은 작품마다 이야기를 넣는 작가로도 유명한데, 마치 SF나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특유의 상상력이 그림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상상력은 스팀펑크 예술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공상과학에 기반을 둔 상상이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스팀펑크아트전'의 김찬용 미술전시해설가는 “탁월한 상상력 덕분인지 스팀펑크 작가 중에 일러스트와 영화, 애니메이션 쪽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많다"고 설명했다.

재미있는 점은 스팀펑크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발전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2007년 인터넷에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며 매니어층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은 작품이 바로 '스팀펑크 노트북'이다. 황동으로 마감된 노트북은 전원 버튼이 아니라 황동 열쇠를 써야 열 수 있다. 열쇠를 돌리면 딸깍하는 소리가 난다. 고풍스러운 외형과 과학 기술에 견줄 만한 장식, 그리고 손을 써서 기계를 작동시키는 행위. 바로 스팀펑크 매니어를 열광시키는 요소들이다.

스팀펑크의 장점은 거의 모든 예술 장르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시작된 스팀펑크는 회화와 조형물은 물론이고 조명이나 자전거 같은 제품디자인으로도 선보인다. 최근 가장 활발한 장르는 스팀펑크 공예, 새롭게 주목받는 것은 스팀펑크 패션이다. 또 타이포그래피, 보석 세공과 건축, 애니메이션까지 발전하는 추세다. 김 미술전시해설가는 "다양한 장르만큼 앞으로 성장할 잠재력도 크다"고 덧붙였다.

스팀펑크 작가 야스히토 우다가와(오른쪽)을 인터뷰 중인 우윤지 학생기자(위쪽 사진).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준 야스히토 우다가와 작가.

스팀펑크아트전에서 만난 작가 야스히토 우다가와

상상력에 의존해 작품을 만드는 '스팀펑크'. 스팀펑크의 대표주자라 불리는 야스히토 우다가와 작가를 ‘스팀펑크아트전’이 열리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우윤지 학생기자가 직접 만났다. 야스히토 우다가와는 볼트와 너트 같은 금속 재료를 이용해 곤충과 물고기, 새 등의 동물을 만드는 스팀펑크 작가다. ‘기계와 생물의 결합’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들어봤다.

-스팀펑크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릴 때 도마뱀이 꼬리를 끊고 달아가는 것을 봤습니다. 잘린 꼬리가 기계로 살아나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한 게 계기였습니다. 잘린 꼬리가 살아날 리 없으니 스스로 만들어보기로 한 거죠. 사실 제가 어렸을 때는 지금처럼 장난감이 많지 않았어요. 주위에 버려지는 물건들을 모아 저 스스로 장난감을 만들었죠. 또 제가 살던 곳은 산과 밭, 바다가 근접한 시골이어서 개구리 같은 곤충과 가깝게 지냈고, 로봇이나 기계가 나오는 만화영화도 참 좋아했습니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제 머릿속에는 늘 생물과 기계가 함께했던 거 같습니다.”

-기계를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기계의 어떤 면이 좋은가요.
“기계를 보면 힘이 느껴집니다. 형태에서 오는 강함입니다. 또 규칙적으로 늘어선 톱니바퀴, 움직이면서 진동을 내는 기계, 기름이 발라진 쇠 냄새는 기계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작품이 스팀펑크 중에서도 어떤 분야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스팀펑크의 특징은 일단 소재에 있습니다. 철, 청동 등의 금속을 메인으로 하는 예술이죠. 이걸 단어로 바꾼 것이 증기, 즉 스팀인 거죠. 하지만 작품 활동을 하면서 어떤 분야를 정해 두지는 않습니다. 카테고리를 정해버리면 생각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죠. 정해진 틀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좋아한다는 표현보다 팔 수 없는 작품이란 말이 더 맞겠네요. 그런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붉은 쇠똥구리벌레’입니다. 쇠똥을 굴리는 벌레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동그란 똥 모양은 폐자재를 모아 만드는데, 작품에 쓰일 자재를 얻으려면 여러 물건을 분해해야 하죠. 그 작업이 꽤 힘이 듭니다. 분해에 몰두하면 작품을 만들 시간이 별로 없을 정도죠. 결국 그 일을 아버지가 도와줬습니다. ‘붉은 쇠똥구리벌레’는 아버지가 분해해준 자재가 가장 많이 쓰인 작품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더욱 팔 수 없는 작품이 됐죠.”

-10대 청소년들도 스팀펑크 아트에 도전할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유치원에서 친구들이 그림을 그릴 때도 저는 요구르트병에 수수깡을 붙이며 공작을 했습니다. 그게 점점 쌓이고 쌓여 지금이 됐죠. 크면서 만드는 규모도 커지고 공구도 복잡한 것을 쓰게 됐습니다. 중학생 때는 자전거를 직접 만들기도 했고요. 주변에 버려지는 것들을 이용해, 그리고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만드는 겁니다. 금속만이 아니라 나무, 고무, 플라스틱 종이 등 주변의 모든 것을 다 씁니다. 실제 지금 작품 중에는 사인펜 뚜껑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고요. 좋아하는 일이라면, 꼭 도전해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스팀펑크아트전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향수와 기계적 미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스팀펑크아트전‘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5월 19일까지 열린다. 스팀펑크는 이미 미주와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예술 장르다. 전시는 회화와 사진·조형물·영화·애니메이션·소설·패션 등 총 256점의 스팀펑크 작품을 선보이며, 역사와 순수 미술, 디자인과 영화 분야로 나눠 소개한다.
시간: 오전 11시~오후 8시. (3월 31일, 4월 28일 휴관)
가격: 일반 1만2000원, 청소년 1만원, 어린이 8000원.
문의: 02-730-4360.

취재=우윤지(서울 보평초 6) 학생기자
글=이세라 기자 slwitch@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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