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커버그 다독이려다 체면만 구긴 오바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저커버그(左), 오바마(右)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황제와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 맞붙었다.

 페이스북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마크 저커버그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얘기다. 두 사람의 결전 대상은 인터넷 사찰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역사상 유례없는 광범위한 도·감청이 발단이 됐다. NSA가 인터넷 사용자들의 정보까지 빼낸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오바마와 저커버그는 2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만났다. 오바마가 정부의 인터넷 감시 프로그램 개선 노력을 설명하기 위해 정보기술(IT) 업계 거물들을 초청한 자리에서다. 참석자는 저커버그 외 5명. 구글의 에릭 슈밋 CEO를 비롯해 넷플릭스, 드롭박스, 팔론티르 테크놀로지스, 박스사 등의 CEO였다.

 사실 이날 회동 자체가 저커버그로 인해 갑자기 마련된 것이었다. 저커버그가 지난 13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미국 정부는 인터넷을 지키기 위한 투사가 돼야지 인터넷의 위협이 돼선 안 된다”는 글을 올린 것이 발단이었다. 저커버그는 이 글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 정부가 우리 모두의 미래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에 대한 좌절감을 전했다”고 소개했다.

 점잖게 말해 ‘좌절감 표현’이지 실상은 NSA의 불법 사찰활동에 대한 강력 항의였다. 그는 또 “미 정부는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훨씬 더 투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을 믿게 될 것이다”는 경고성 요구도 했다. 이날 통화에서 저커버그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충분한 답변을 듣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불행하게도 진정한 전면 개혁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저커버그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시점은 NSA가 악성코드를 유포한 뒤 페이스북 서버를 사칭해 불법 사찰했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사실이라면 페이스북으로선 신뢰의 사활이 걸린 일이다. 저커버그의 글은 위력적이었다. 몇 시간 만에 수십만 명이 ‘좋아요’를 누르는 등 순식간에 SNS 공간을 달궜다. 그러자 백악관이 파문을 진화하기 위해 서둘러 저커버그 등을 초청한 것이었다.

 오바마는 이날 회동에 페니 프리츠커 상무장관과 밸러리 재럿 백악관 선임고문, NSA 고위 간부들과 함께 나타났다. 정면 대결장 분위기가 흘렀다. 오바마는 장시간에 걸쳐 안보수단과 개인 권리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한 미 행정부의 조치를 설명했다. 그는 저커버그 등에게 “안보적 필요사항과 온라인 프라이버시 간에 균형을 잡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날 회동도 저커버그를 만족시키진 못한 것 같다. 페이스북은 회동 직후 “미 정부가 감시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지만 충분치 못하다”는 성명을 내놨다. 기껏 자리를 마련한 오바마로선 체면을 구긴 셈이 됐다.

 저커버그에겐 응원군이 있다. 의회다. 오바마 행정부가 만들고 있는 NSA 정보수집 활동 개선안은 의원들의 손을 통과해야 한다. 토론과 검증이 막바지다. 게다가 구글과 애플 등 IT 업계는 저커버그와 한목소리다. IT업계는 이미 수백만 달러의 로비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무엇보다 저커버그는 SNS의 황제다. 수많은 네티즌의 지지가 있다. 이번에 자유로운 인터넷 세상의 대변자 이미지를 더 확실히 굳혔다. 페이스북은 성명에 “지구촌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보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 권리가 있다. 페이스북은 미국 정부가 그들의 관행에 대해 보다 투명해지고, 시민들의 자유를 더 보호하도록 계속 촉구할 것이다”고 썼다. 공은 오바마에게로 넘어갔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