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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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광희문 복원공사가 준공되었다. 서울 동남, 지금의 퇴계로가 끝나는 데서 고가구름다리를 넘어 신당동으로 가는 한 길가에 세워졌다.
요즘의 사람들은『언제 그런 대문이 있었나』하고 눈을 크게 뜰지도 모른다. 지금 까진 고성이 뚝 끊어진 채로 그나마 폐허나 다름없이 버려져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 꼭 60년 전까지는 대문이 서 있었다. 1915년 소실된 뒤로는 그냥 내버려두었었다.
옛사람들은 이 대문을 수구 문이라고 불렀다. 속칭「시구 문」이라고도 한다. 한자로는 「시구 문」.
이 별명은 이조 때 서소문과 함께 시체를 성외로 내갈 수 있는 대문이란 뜻에서 비롯된 것 같다.
수구 문은 서울의 수구였던 오간 수도(살곶이 다리가 있는 개천)근처에 있는 대문이라, 그렇게 불렀다.
옛 서울도성의 내외를 잇는 문호는 사대정문과 사소간 문이 있다. 사대정문이라면 정북의 숙정문·정동의 흥인문·정남의 숭례문·정서의 돈의 문을 말한다.
오늘날엔 동대문·남대문 등으로 불리는 흥인문과 숭례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사소간 문은 정 방향의 사이사이에 낀, 동북문의 홍화문·동남의 광희문·서남의 소덕문(소의문)·서북의 창의문을 일컫는다. 이들 문 가운데 홍화문은 동소문·소덕문은 서소문 등으로 속칭된다. 이 가운데 창의문만이 속칭 자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이들 팔 문이 건립된 연대는 이태조 5년(1396년) 무렵. 당시 민정 8천76명을 모아 성을 쌓고, 다시 가을에 7만9천4백3l명을 모집, 성문을 세웠었다. 그후 세종 때 돌로 개축되었다.
연대도 아득히 흘러갔지만, 그 무렵의 서울은 지금의 감각으로는 읍 정도나 되었을 것 같다. 새삼 5백년 남짓의 터울을 놓고 옛 서울의 풍 정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이번 광희문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던 사소간 문 가운데 하나로 복원이 된 셈이다. 팔문 중 정문 2개, 소간 문 2개가 남아 있거나 복원이 된 상태다.
서울을 옛날의 감각만으로 다시 꾸밀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무계획하고, 어지러워지고 살풍경한 가운데 옛날의 고담한 아 취들을 곳곳에 되찾아 내는 것은 한결 기분이나마 훈훈하게 해준다. 고작 고도 서울의 인상을 보려면 고궁이나 가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새로 준공된 광희문은 주변에 빈약한 대로 조원도 있고, 울타리도 둘러 명물의 모습을 갖추긴 했다. 이런 계획은 좀 자주 있어서 서울도 고왕 도로서의 체통을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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