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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와 봉사」로 70년|고희 맞는 대한적십자사의 어제와 오늘-17일 기념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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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박애와 봉사」를 상징으로 하는 대한적십자사가 27일로 창립 70돌을 맞는다 (기념식은 17일). 한적은 구한말인 광무 9년 (1905년) 10월27일 창립된 이래 수난의 민족사만큼이나 숱한 영욕을 함께 겪으며 이제 고희의 연륜을 쌓은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적십자 운동은 고종의 제창으로 시작됐다.
고종은 1903년1월8일 당시 「광제 박애」하는 만국 적십자 운동의 뜻을 받아들여 『육군의 부상자 상태 개선에 관한 1864년8월22일자 「제네바」 협약』에 정부가 가입케 했다.
이듬해 3월26일에는 당시 민영찬 대한 제국 주불 특명 전권 공사에게 「헤이그」 국제 적십자 회의에 황제의 특사로 참석케 하여 『병원 선에 관한 조약』에 조인한 것을 계기로 한국이 국제 적십자 기구의 일원이 됐다.
뒤이어 1905년10월27일 칙령 제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이 제정 공포되어 정식 발족됐다. 고종은 창립때 2만5천원을 내려 병원 건축과 6개월간의 경비 및 병상자 치료에 쓰도록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규칙 제1조 『본사는 황제 폐하의 지존하신 보호에 의해 성립하고 빈곤한 상병자를 구호하기로 목적을 위함이라, 천재 혹 사변에 재하여 그 상병자도 구호함이라』는 내용에도 그 정신이 담겨 있다.
적십자사 사옥은 단층 기와집이었고 위치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창성동 (당시 대동)에 있었다.
초대 총재는 의양군 이재각씨. 사장은 심상훈 부장이었고 부사장은 엄주익씨였다.
그러나 대한적십자사는 창립 4년만인 1909년7월23일 일본 적십자사에 합병·폐지됐다. 일본 적십자사 조선 본부는 주로 일본군을 돕기 위한 기구였다.
l910년12월10일에는 일본 적십자사 한국 위원부 (후에 일본 적십자사 조선 본부로 개칭)로 명칭마저 바뀌어졌다.
그후 상해 임시 정부는 1919년8월29일 상해에 대한적십자회를 설립했다.
임시 정부는 내무부령 제62호에 『대한 독립군의 의료 보조 기관으로서 또 국제 적십자 원칙의 가능한 범위 안에서 구호 사업 기관으로 발족한다』로 규정했다.
회장은 이희경씨. 부회장은 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 안정근씨 이사장은 서병호씨였다.
21년 간도 지방에서 일본군이 한국인을 대량 학살했을 때 일본군의 비인도적 행위를 전세계에 호소하기도 했고 이관용씨를 「제네바」에 보내 독립 국가의 적십자 기구로서의 승인을 받으려고 시도했으나 실패, 이 회는 22년2월께 가서 흐지부지 없어졌다.
상해 대한적십자회의 간호원 양성소는 독립군이 일본군과 충돌할 때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3개월간 강습을 했다. 당시 강사는 상해 홍십자 병원에 근무하던 김창세 의사 (「세브란스」 의전 출신) 등 4명. 졸업 후 응급 간호대를 조직, 선전 활동을 했고 김규식 박사의 부인 김순애 여사도 함께 일했다고 한다.
해방 10일만에 조선 적십자 창립 위원회가 결성됐으나 11월9일 해산했다. 46년7월27일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조선 적십자사가 설립했으나 이것마저 2개월 만인 9월27일 군정 장관의 해산 명령으로 문을 닫았다. 해산 명령이 내린 이유는 『인종과 종교의 차별 없이 각계 각층의 인사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후 47년3월16일 서울시와 각도 (각 4명씩)에서 유지들이 선출한 40명과 남조선 과도 정부 입법 의원에서 지명한 12명, 그리고 군정 장관이 임명한 8명 등 모두 60여명으로 구성된 조선 적십자 창립 위원회가 발족을 보았다.
이날 과도입법 의원 의사당에서 창립 대회가 열려 총재에 김규식씨를 선출했다.
이것이 대한적십자사의 해방후의 모체로서 48년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적십자사로 명칭이 고쳐졌다가 49년4월30일 대한적십자사 조직법 (법률 제25호)이 공포되어 그해 10월27일 발전적 해체를 보아 초대 총재에 감리교 총감독이었던 양주삼씨가 취임했다. 부총재에는 유각경 여사가 선임됐다.
2대 총재는 피난지인 부산에서 윤보선씨 (50년11월)가, 3대 총재에는 한때 보건부 장관을 지냈던 구영숙씨 (52년9월2일)가 취임했다.
4대 총재에는 서울 수복 후인 54년4월19일 손창환씨 (자유당 말에 보사부 장관)가 취임, 이때부터 적십자 사업이 본궤도에 올라 회원수가 50년에 1백11만명이던 것이 3백만명으로 늘었다.
또 55년5월26일 한적은 적십자 국제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9월28일 74번째로 회원사가 되었다.
5대 총재는 최두선씨 (60년8월8일 취임)로 72년8월8월까지 12년간 재임하면서 안정과 성숙을 기했다.
특히 71년8월12일은 1천만 이산 가족 재결합을 위한 「인도적 남북 회담」을 북적에 제창, 27년간 단절되었던 역사적인 대화의 문이 틔게 되었다. 이 회담은 73년7월까지 서울∼평양간을 7차례나 번갈아 가며 내왕하면서 계속되었다.
김용우 6대 총재에 이어 지난 7월30일 제7대 총재로 이호씨가 취임했다.
대한 적십자사는 이제 70돌을 맞이하면서 헌혈 사업 확대, 자주적 회비 수납 체제 촉진, 긴급 구호 사업 확대 등 5개년 계획을 추진중이고 ▲의료 사업 ▲안전 사업 ▲심인 사업 ▲봉사 사업에 중점을 두면서 겨레의 여망인 남북 회담 재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원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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