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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민스크」에 한국을 심고 왔다"|소 원정레슬링선수단 코치 정동구씨 수기(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가지고 간 반찬 손수 요리>
「민스크」의 공기는 의외로 차가웠다. 섭씨 4∼5도.「모스크바」의 기온이 섭씨 18도 정도였는데 훨씬 남쪽인 이곳이 이렇게 춥다니 웬 이변인가.
국영관광국에서 직영하는「인투어리스트·호텔」에 여장을 풀고 이날 낮 선수들에겐 잠만 자도록 지시했다. 충분한 휴식이 중요함을 경험을 통해 절감하고 있기 때문.
필자도 이날 하오엔 푹신한 침대에서 피로를 풀었다. 오랜만의 잠이었다. 야간 열차 속에서 공연히 한잠도 자지 못했었다.
어제「모스크바」붉은 광장에서, 또 오늘「민스크」거리에서『같이 기념사진을 찍자』 「카메라」를 바꾸지 않겠느냐』면서 따라 다니던 소련의 젊은이들과.「모스크바」∼「민스크」간의 목장·과수원·삼림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시골풍경 등 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 잠을 쫓아낸다.
「인투어리스트·호텔」에서는 방 6개를 배정 받았다. 한방을 2명씩 쓰기로 하고 방 1개는 식당겸용, 가지고 간 김치·된장·고추장으로 손수 음식을 해먹었다.
9일 상오 7시기상, 선수들에게 간단한「컨디션」조절운동을 시킨 후 내의와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백화점엘 갔다. 백화점에도, 거리에도 사람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택시 등 일반차량 드물어>
넓고 깨끗하게 다듬어진 거리에는 전차가 질서정연하게 운행되고 있었으나「택시」등 일반차량은 드물었다.
그리 높지는 않으나 장중한 건물, 무성한 가로수가 잘 정비된 시원스런 거리, 한마디로「민스크」시의 정경은 청결했다.
백「러시아」공화국의 수도로서 공업과 문화의 중심지인「민스크」는 1806년 철로가 개통되면서 소련서남부의 교통 중심지가 되어 있다.「모스크바」로부터 8백km나 떨어져 있으나 「폴란드」수도인「바르샤바」와는 불과 80km거리. 소련의 대「유럽」관문이다.
우리 선수단의 통역 겸 안내원인「알렉」군에 의하면「민스크」시는 소련국민이 2차대전의 교훈을 기리는 기념 적 도시임과 동시에 재건과 번영의 의지를 과시하는 표본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2차 대전 때「민스크」를 포함한 백「러시아」는「나치」독일의 침공을 받아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8백만 인구 중 2백30만이 죽었고「코자크」족의 거점으로서 유서 깊은「민스크」시는 불과 6채의 집만 남고 완전히 재로 변했다고 하니 전화의 참혹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만 하다.
그러나 전후 소련은 이 폐허 위에 하나의 기적을 이뤘다.

<곳곳에 2차 대전 기념물>
수많은 공장과 거대한 건물이 즐비한 인구 1백25만의 이 대도시가 과연 30년 전에는 폐허였던가.
시 중심부에 서울 시청 앞 광장만큼 널따란 원형의「빅토리·스퀘어」(전승광장)가 있고 그 한가운데에 전승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는 또 소련 유 일의 전쟁박물관도 자리잡고 있었다.
시내 곳곳에는 붉은「아치」에 받쳐진「1945∼1975년」이란 흰 글씨의 대형간판이 나붙어 있었다.
영(0)에서 시작된 전후 30년간「민스크」의 재건을 PR하는 뜻인 듯하다.
「알렉」군의 안내로 찾아본 국립묘지도 소련국민이 2차대전의 상처와 교훈을 영원히 되새기는 곳. 26채의 가옥 모형 위에 종 탑이 있고 30초마다 종이 무겁게 울려 2차대전의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종 탑에는 대전 중 백「러시아」1백83개 마을에서 2백36만 명이 참혹하게 죽어 갔다고 쓰여 있고 생후 7개월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자의 이름과 나이가 모조리 적혀 있었다.「알렉」군은「나치」독일 군이 26개 가구의 온 가족을 한데 모아 놓은 후 불을 질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26개 모형가옥은 이 사실을 증언하는 것.

<"같이 춤추러 가자" 권유도>
한국선수단의 안내를 맡은「알렉」군은 22세의 백「러시아」외국어학원 3학년에 다니는 훤칠한 키의 미남이다. 잠만 따로 잘 뿐「민스크」체재 중 그림자 같이 같이 다니며 최상의 친절을 베풀어줬다. 무뚝뚝하다는「슬라브」의 인상과는 너무나 다른 쾌남아였다.
1년 동안 영국에 유학, 영어를 익혔다는「알렉」군은 아버지가 대학교수이며, 어머니는 내과의사인 좋은 집안의 자제였다.
선생이나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것이 희망이라던 그는 우리가 장차 주한소련대사가 될 거라고 농담하자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혹시 우리가 이에게 새로운 이상과 꿈을 불어넣었는지 그는 한국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 한국의 풍물 등 여러 가지를 알려고 애섰다.
그는 자기의 애인을 소개해 주겠다는 등 우리와 급속히 친해져 시내「클럽」에 가서 춤을 추자고 먼저 청하기도 했다.
「알렉」군의 한국선수단에 대한 보살핌은 너무나 열성적이어서 우리는「민스크」를 떠날 때 역에서 그를 헹가래 치며 80년「모스크바·올림픽」에서의 재회를 약속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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