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이 국회의원 관광가이드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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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사례1. “국회의원님들이 한 번씩 왔다 가실 때마다 외교관의 역할이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관광가이드가 된 기분이라니까요.”

 지난해 동남아의 공관에 근무했던 외교부 서기관 A씨는 의원외교차 현지를 방문한 국회의원들을 수행한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의원들은 경제협력을 내걸고 방문했지만 산업·문화시설 시찰은 하지 않고 일정을 관광과 쇼핑으로 채웠다고 한다. A씨는 “한 의원이 시내에 있는 명품점에 데려가 달라고 했지만 가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현지에 오래 있으면서 그런 것도 못 찾느냐며 호통을 치더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사례2. 18대 의원을 지낸 한 의원이 미주지역을 방문했을 때의 얘기다. 해당 의원은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이 아니었지만 법조인 가족이란 이유를 들어 “사법외교를 해야겠다”고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외교관 B씨는 “열흘 일정 내내 공관 차량을 자가용처럼 타고 다녔다”고 전했다.

 #사례3. 아시아지역 재외공관에서 근무한 서기관 C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C씨는 “호텔에 투숙 중인 한 의원이 급한 일이 있다고 불러서 갔더니 미니바 사용료 문제로 호텔 직원과 언쟁을 벌이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통역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며 “통역·번역 업무는 우리 국민에게 제공하는 영사 서비스에도 들지 않는 일”이라며 허탈해했다.

 해외 공관에 근무한 외교관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이런 일들을 겪는다는 게 재외공관 직원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물론 의원외교차 현지를 찾는 국회의원 방문단을 맞이하는 것은 공관의 업무 중 하나다. ‘국회의원 해외여행 시 예우에 관한 지침’은 현지 공관이 의원들에게 공식 일정 주선, 현지 교통 편의 제공 등의 업무 협조를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문제는 ▶의원 방문단이 특정 시기에 몰리는 데다 ▶유명 관광지에 집중돼 출장이란 본래 목적보다는 관광 등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국회의원 수행에 시간과 노력을 쏟느라 정작 재외국민 보호 등 본연의 임무에 차질을 빚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야 정치권이 이른바 ‘특권 내려놓기’ 경쟁을 벌였지만 이런 외유성 해외출장 관행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바른사회시민회의란 시민단체가 정보공개 청구로 입수한 전수조사 자료를 보면 2012년 6월 19대 국회가 개원한 이후 지난 1월까지 국회의원의 해외출장은 모두 81건이다. 지난해에만 72억2000만원의 예산을 썼다. 3월에도 100여 명에 달하는 의원이 출장을 가 있어 이를 합치면 출장건수는 100건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자료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문제투성이가 한둘이 아니다. ‘무늬만 출장이고 실상은 여행’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2013년 7월 국방위원회는 방위산업 관련 출장을 떠나며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틀을 머물었지만 공식 일정은 ‘유학생 격려 오찬’이 유일했다. 같은 달 안전행정위원회는 10박11일간 남미를 방문했다. 이들은 돌아와서 낸 보고서에 4일간의 일정은 아예 적지 않았다.

 활동이 끝난 뒤 20일 이내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공개하도록 한 규정을 지킨 경우도 거의 없었다. 2011년에 다녀온 출장 보고서가 올해 2월에 올라온 경우도 있었다. 방문국의 정치·경제·사회현황 등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내용들로 보고서를 채운 경우도 상당수였다. 바른사회시민회의 이옥남 실장은 “의원 스스로 ‘방문외교는 해외시찰’이라는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외유 논란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이제 과거처럼 의원들이 견문을 넓히는 방식의 의원외교 시대는 끝났다”며 “ 정부·민간외교와 함께 외교의 3대 축인 의원외교는 전문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전환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김 전 의장은 “국민의 세금으로 외교활동을 펼치는 의원들은 임기 내에 특정 국가의 의원들과 신뢰관계를 쌓아 전문가로서 국제적인 공조를 형성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지혜·강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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