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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1439)<저자·이철승>|전국학연<제47화>-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광주의 테러>
1946년 6월3일, 전북 정읍-.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미가 없고, 통일정부를 그대하나 여의치 않으므로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윈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할 때가 왔다.』
지방 순회 중에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밝힌 이승만 박사의 이 발언은 국내 정가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조선공산당은 즉각 성명을 내어 『반소 반공운동을 일으키려는 음흉한 처사』라고 규탄하고 한독당도 『38장벽을 연장시키는 위험스런 방책』이라고 이를 비난했다.
그러나 한민당은 『민족의 분열은 미·소의 분할점령과 공산당의 책동에 있다』고 이박사를 옹호하고 나섰다.
남한당 정론에 대한 찬반의 소용돌이는 지방에까지 번졌고 좌우대립은 더욱 격화됐다.
전남 「민전」과 「민청」은 46년6월15일 광주극장에서 이박사의 단정론을 규탄하는 대대적인 찬탁대회를 열었다.
본래는 「광주공원」에서 갖기로 했으나 당시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씨가 옥외집회를 금지해서 실내장소를 택했다.
주최측인 「민전」은 각 세포를 총동원 했다. 가지가지의 동원 방법을 써서 고무신 요등을 돌리거나 시민위안공연이 있다고 유혹했다.
광주학연은 저지책을 짰다. 그래서 옥내 저지반·옥외 저지반을 편성했다.
대화가 열리기 전 장형식(뉴요크대교수)·배량태·정현성·정광호·정길수·오인제 등 1백 여명의 정예 요원들이 요소 요소에 배치됐다.
이윽고 막이 올랐다.
그들은 적기가부터 불렀다. 뒤이어「민전」위원장 박모가 개회사를 했다.
그는 미제국주의의 타도, 신탁통치 절대지지 등을 내용으로 해서 선동 연설을 했다.
이때 였다. 장영식이 벌떡 일어나 『이게 시민위안대회냐. 찬탁하는 놈들은 소련으로 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여기저기서 『옳소!』소리와 함께 장래가 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좌익 행동대원들은 가차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쪽은 미리 준비해간 고춧가루로 맞섰다.
그 좌익진영은 권총까지 발사하며 진압하려 했다. 그러자 시민들은 거리를 쏟아져 나왔다.
약싹빠른 좌익은 어느새 「플래카드」를 몰려나가는 시민들 앞에 내세웠다.
『이것은 학연의 짓이다. 학연을 쳐부수자!』 그들이 이런 말로 선동하자 선량한 시민들은「데모」군중으로 변했다.
경찰이 긴급출동했건만 거센「데모」군중을 막지 못했다. 학연 돌격조가 시위군중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중과부적, 20여명이 그들의 몽둥이에 맞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할 수 없이 학연은 권총을 위험발사하며 육박전을 감행했다.
그래서 겨우 「데모」대를 진압했다. 그러나 학연의 장치는 컸다. 장형유 배량태 등 20여명이 부상, 입원했다.
백주 대로상에서 「테러」를 당한 것은 더욱 참을 수 없는 일.
긴급 돌격조를 재편성해서 민전 본부(지금 십자의원자리)로 몰려가 휩쓸어 버렸다.
그들의 비밀조직문서 일체도 압수했다.
그러나 『피로써 피를 씻는』 공산당의 도전행위는 이에서 그치지 앉았다.
이 사건이 있은지 1주일후-. 광주학연은 6월24일 밤 반탁학연 중앙본부에서 보내준 계몽영화 『애기와 여학생』을 광주극장에서 상영했다.
이 영화는 어느 여학생이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왜놈의 총칼에 맞아 순국한다는 내용.
영화가 끝나자 광주학연 간부들인 정현성·장충식·오인제·정길수·정광호 등은 학연숙소인 서울여관으로 갔고 감찰부장인 차영후는 양림동 자택으로 갔다.
유난히 몸집이 큰 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광주천변을 유유히 걸어 갔다(차부장은 힘과 몸이 거인이요, 의리의 사나이로 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랐다) .
밤11시 가랑비 조차 내렸다.
이때 두발의 총성이 칠흑의 어둠을 찢었다. 차가 저격당했다.
차는 「윽!」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땅바닥에 뒹굴었다. 차를 쏜 박대성(서중·월북)은골목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러나 고정망 하복부 관통상을 입었을 뿐 다행히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배를 움켜쥐고 충장로파출소까지 뛰어가 신고하고 그만 까부러졌다.
다음날부터 광주학연은 전맹원이 도망간 박대성을 찾아나섰다. 차는 도립병원에 입원시켰다. 우연히도 차가 입원한 병실 바로 옆방에는 후일 여수 순천반란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중위가 입원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좌익학생들이 그 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러나 저격범 박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박이 광주의전에 있다는 제보를 받고 맹원 10여명이 달려갔다. 경찰서에도 연락해서 김원중형사 등 3명의 경찰이 같이 갔다.
박은 낌새를 채고 도망가는 것을 경찰이 발표, 체포했다.
부상한 박은 치료를 받기 위해 도립병원에 입원됐다. 그러나 그는 5일 후 좌익세포 간호원 조경순의 도움으로 탈출, 월북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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