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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 현장서 확인한 한·일교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일 양국간의 고대문학교류의 경로를 알아보기 의한 삼한해로답사는 원시적인 방법의 항해, 즉 인력만으로 2천 여리와 바닷길을 항해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 외에 양국문화교류연구의 기초적인 터전을 마련했다는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지난 5일 상오9시45분 일본구주「후꾸오까」(복강)항에 도착함으로써 후일간의 답사항해를 끝낸 삼한해로 답사선 한호(일본해역에서는 왜호로 명명)는 장마와 태풍철인데 불구하고 전「코스」의 항해를 무사히 끝냈다는데 이번 행사는 더욱 빛나고 있다.
한호의 총항해 거리는1천1백km. 숙박과 유적 답사등을 위해 일시 기항한 항구나 포구는 30여개소. 답사의 목적은 3세기를 전후한 우리나라 삼한시대와 일본최초의 왕국인 야마태국과의 문화교류및 교역이 이뤄진 해로를 확인해보고 유적들을 더듬어 희미한 고대 한·일관계의 역사와 기록을 보다 정확히 밝혀보자는 것.
때로는 심한 풍랑과 5m이상의 높은 파도를 만나 모선의 예인을 받아야했고 때로는 평균2「노트」이상의 속도를 유지했던 한호의 항해는 그러나 대체로 순조로 왔다는 것이 답사반의 견해.
특히 많은 위험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했던 현해탄 항해는 의외로 간단히 끝나 일부 답사반원들은『오히려 싱거웠다』고 말할 정도였으나 9시간의 항해 끝에 현해탄을 건널 수 있었던 점은 우선 원시적인 고대항로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해 준 것이었다.
한국연안에서는 옛 우리조상들이 입었던 흰 베옷과 밀짚모자를 쓴 10명의 사공들이 두줄로 서서 한국식 노를 저어 항해했으나 부산에서부터는「시모노세끼」(하관) 수산대생 14명이 서양식 노인「커터」를 양쪽에 앉아서 젓는 매우 대조적인 항해를 했다.
그러나 대마도「와니우라」(악포)와 일기 섬,「가쓰모도」(승본)등에서 출영나온 일본목선들의 노가 한국 노와 같고 사공들이 머리에 맨 수건도 한국식으로 옆에다 동여매어 일본의 고대노도 역시「커터」가 아닌 한국 노와 같은 것이었음을 말해주었다.
삼국지·혼지·왜인전이나 기타 기록을 통한 연구결과 우리나라 삼한 각 국들이 일본구주지방과 쇠붙이등의 교역을 비롯한 문화교류를 가졌음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이번 답사에서도 대마도 일기섬 북구주일대의 유적에서 한·일학자들은 이 같은 사실을 다사 한번 재확인했다.
특히 기원전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으로부터 직수입설과 모방설이 엇갈리고 있는 대마도및 일기일대의 석실고분들과 각종 토기·돌 칼등은 우리나라 김해식 토기와 석관막들보다 1∼2세기쯤 뒤진 것으로 모형이나 구조가 비슷해 우리나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
또「가쓰모드」의 횡혈식 대형고분은 우리나라고구려의 고분이 일본에 들어와 일본화 한 것이라고 답사반의 김원용 박사는 말했다.「가라쓰」일대는 옛날부터 한국인들이 많이 건너가 살았고 한국인의 피가 섞인 미인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
또 말노「쓰시마」(대마도)등과 같은 일본지명의 어원이 한국어의머리,「둘」「대미」등에서 유래된 것 같다는 지명고증에 대한 한·일 학자들의 의견이 이번 답사 중 상당히 접근 되기도 했다.
그러나 구주 지방설이 거의 정설화된 야마 태국의「히미꼬」여왕에 대해서는 하녀를 1천명이나 거닐었다는 전설등을 증명할 기록이나 유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무속신앙에 근거한 단순한 상징적 존재라는 한국학자들의 주장과 실존적 인물이었다는 일본학자들의 주장이 정 반대로 엇갈렸다.
이번 답사를 통해 해류와 계절풍등을 정확히 이용, 일엽편주에 불과한 배만으로 한·일간을 왕래한 고대인들의 예지를 다시 한번 새롭게 느끼게 했다.
더욱이 양국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순수한 민간「레벨」의 합동학술조사로서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은윤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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