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6)전국학련(제47화) 나의 학생운동 이철승(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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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피검>
만일 그때 내가 중국으로 탈출했더라면 오늘날의 내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탈출이지 당장 울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편에 중국으로 망명하는 것은 더욱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다락에 숨어 학병지원마감일을 넘기기로 했다.
내가 다락에 숨어있는 동안 전주의 아버님이 경찰서에 붙들려 갔다는 전갈이 왔다. 「철승이를 찾아내 반드시 입영시켜야한다』고 위협도하며 들볶기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런 행패는 우리 집만이 당하지는 않았다.
마감일이 닥쳐도 지원율이 형편없자 총독부는 당사자를 잡아 강제로 도장을 찍게함은 물론 당사자의 집에는 배급표를 주지않았다. 또 노부모를 데려다 족치고 친척중에 관리가 있으면 데려다가 사표를 내라는등 온갖 협박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지원서에 도장을 찍기만하면 그날로 그 집엔 특별배급이 나오고 당사자에겐 요샛말로 특혜가 베풀어졌다. 심지어 술과 여자까지 제공되는가 하면 아무리 사고를 내도 치외법권을 누렸다.
민족의 정수를 마취시키는 간악한 일제의 술책이다.
보전의 경우 마감일을 1주일 남겨놓고 전체 2백50여명의 대상자중 40∼50명밖에 지원하지 않은 부진상태를 나타냈다. 정무총감이 친히 학무국장을 대동하고 교장인 인촌, 생도감인 설산, 법과과장인 유진오선생을 부민관 (현 국회의사당)2층으로 불러 온갖 협박을 자행하였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1943년11월20일 드디어 학병지원 마감일이 닥쳐왔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학병지원율 1백%」라고 대서특필했다. 방송도 우렁찬 군가와 함께 이 사실을 보도했다.
『그럴리가 없다. 분명히 허위날조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그토록 들볶았으니 그 말이 맞을것같기도 했다.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나 삼촌은 밖에 나가는 것을 한사코 말리셨다. 사람이란 언제나 전환점이 중요하다면서 며칠 더 숨어있으라고했다.
닷새후인 11월25일. 마감도 지났거니와 방학도 됐다. 학교에는 운동부원만 나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살짝 들어가 동정이나 살필양으로 거리에 나섰다.
누구누구가 지원하고 누구누구가 피신했는지 제일 궁금하였다. 종로에서 전차를타고 청량리 성동역까지 갔다.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걸어 학교안에 들어섰다. 교정은 물을 끼얹은듯 조용했다.
텅 빈 운동장에 서서 우람한 석탑을 바라보는 내 눈엔 나도 모르게 눈물이 괴였다
나는 운동부가 있는 본관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바로 그때 배속장교 「가와모도」가 불쑥 나타났다. 맞부닥쳤다.
그의 옆에는 긴칼을 찬 일본군 헌병이 서 있었다.
그는 『너를 잡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네 발로 찾아와 주다니 정말 고맙다』며 표독스럽게 웃었다.
『네놈이 마감날이 지나서 안심하고 나온 모양인데 사실은 너를 잡는 날이 마감날이야』라고한 「가와모도」는 아무래도 우쾌한듯 허공을 향하여 웃었다. 『총독각하께 못알아 듣겠다구 말했다지? 건방진놈, 어서따라와 도장을 찍어!』 그는 나를 끌고갈 자세였다.
옴쭉달싹 못하게됐다. 만사휴의가 아닌가.
순간 나는 이 다급한 국면을 벗어나면 무슨 방도가 생길것 같아 적색을 하고 말했다. 『좋소, 그러나 우리 집에가서 통보라도 해줍시다.』 똑바로 그를 응시하며 이렇게 제의했다.
그는 어찌 생각했는지 옆의 헌병에게 무엇인가 귀엣말로 지시했다. 그리고는 『좋아, 너는 운동한 놈이니까 거짓은 없겠지』하고 다짐을 받으려 했다. 내가 돌아서 나오자 그 헌병을 딸려보냈다.
참으로 천려일실이었다. 당초 지원마감일은 11월20일이었으나 지원율이 형편없자 총독부는 5일간 더 연장했던 모양이다.
나는 꼭 그 마감날 걸려들고 만 것이다. 익선동 삼촌댁으로 갔다. 그날따라 삼촌은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온 헌병은 성화가 불같았다.
나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사정했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시간은 어느덧 밤10시.
헌병은 더이상 못 참겠다는듯 화를 벌컥내면서 무조건 나를 앞장세웠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학교에서 붙잡혀 올때부터 틈을 보아 두들겨패고 도망쳐버릴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남들은 끌려가 죽어도 좋고 나만 숨어살겠다는 것은 어쩐지 정당한 것 같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헌병이 가자는대로 진로3가 단성사옆 어떤 용달사로 갔다. 그때도 용달사가 있어 급한 연락을 대행해 주었다.
그곳에 도착한 헌병은 학병지원서를 내밀며 어서 드장을 찍으라고 재촉했다. 그 지원서는 곧장 학교로 직송된다는 것이다.
그날은 어떻게 하루가 긴지-. 내 생애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모든 것이 운수소관이다. 지원해 버리자.』 나는 지원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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