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드레」의 고대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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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아득한 삼한해로를 더듬는 고대목선은 금강을 1백수10리 거슬러 올라가 어제 29일 백제의 고도 부여에 닿았다.
경주가 눈으로 보는 고도라면 부여는 가슴으로 느끼는 고도란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배가 사비성(또는 사비성)옛터가 바라보이는 백마강에 이르자 승선했던 일본인들은 까닭 모를 눈물을 홀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 고대목선이 닿은 곳은 낙화암 조금 아래에 있는「구드레」라는 나루터.
백제를 왜 일본에서「구다라」라고 불렀는지는 일본인들로선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혹 천수백년 전부터「구드레」라고 불리던 이 나루터의 이름에 기 연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학설은 문외한에게도 그럴듯하게 들리는 얘기다.
이 나루터 가까이 사천왕사가 있었다. 그곳에서「정사」란 간지가 적힌 와당이 나왔다. 이와 똑같은 와당이 일본의 비오사 자리에서도 발견되었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학자들은 「정사」가 서기 597년이라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6세기말에는「구드레」는 대일 교류의 중심지로서 백제의 문화는 이 곳에서 일본으로 흘러갔으리라는 짐작도 간다. 백제문화의 젖줄을 빨고 자란 일본인이 몇 10대 후에 흘린 그 눈물의 까닭을 알만도 하다.
금강은 부여에서 약 40리쯤 하류에 있는 강 경까지 조수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강 경까지는 제법 배다운 배가 조수를 타고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백마강이 갖는 주영의 가치는 별것이 못된다. 그래서인지 옛 일본배가 부여에 닿았다는 뚜렷한 기록은 없다.
이번에 이 일본국적의 고대 선이 부여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어쩌면 백제멸망 후 사상초유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포구에서 날라졌는지는 모르지만, 조상들이 입은 백제문화에 대한 보은의 뜻도 겸하여 그 발상지인「구드레」에 직접 배를 댄 일본인들은 가벼운 흥분마저 감추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부소산에 있는 군창터를 찾았다고 한다. 그곳에는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왕조가 종언을 고할 때 타 버린 미곡이 숯이 되어 남아 있다. 일부 일본인들은 당시의 군량은 일본에서 원조한 것이란 주장을 한 일도 있다.
그러나 오늘 그 숯을 바라보는 젊은 일본인들은 그 양곡의 출산 지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 많은 양을 어찌 여기까지 가져 왔겠느냐 느니, 큰 은혜를 입었으니 약간의 군량을 보태는 성의야 가질 수도 있겠다는 경로의 반응이었다고 한다.「구드레」의 고대 선은 바로 머리를 돌려 남은 길을 찾아 떠났다. 짠 바닷물에 배를 띄운 그들의 마음이 끝내 이와 같이 담담한 가운데 많은 성과 있기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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