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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이 간첩 증거조작 지시했다면 국보법 처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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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의 ‘국정원 협조자’로 검찰 조사를 받던 중국 국적 탈북자 김모(61)씨가 자살을 시도한 서울 영등포의 호텔 내부. [뉴스1]

김진태 검찰총장이 7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을 수사로 전환한 데는 국민적 의혹이 증폭되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되겠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 사건에 대한 특검 도입 여론이 커지는 상황에서 최근 상설특별검사제법이 국회를 통과해 이르면 6월부터 시행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직접적 계기는 ‘국정원 협조자’인 중국 국적 탈북자 김모(61)씨가 지난 5일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서울 영등포의 L호텔에서 “국정원으로부터 ‘가짜서류 제작비 1000만원과 수고비’를 약속받고 조작에 가담했다”는 유서를 남겼다.

 향후 검찰 수사는 국정원이 김씨에게 사전에 위조를 지시했는지(사전 교사), 사후라도 위조 문건임을 알았는지(사후 인지)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직원이 증거를 조작하는 데 지시를 내리거나 관여한 사실이 확인되면 국가보안법상 무고·날조 혐의로 처벌받게 된다. 2010년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대북공작원 출신 박채서(60·일명 흑금성)씨가 간첩 혐의로 구속된 바 있지만 현직 국정원 직원이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거나 처벌된 사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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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씨는 유서에서 “지금의 국정원은 국조원(국가조작원)”이라고 적었다. 국정원의 조작 지시가 있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또 검찰에서도 “지난해 12월 국정원 대공수사팀 수사관이 구체적으로 변호인 측 싼허(三合) 세관 공문 내용을 반박하는 서류를 만들어 올 것을 요구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한 중국대사관 영사부는 지난달 13일 “검찰 측이 피의자 유우성(34)씨의 출입국기록과 관련해 재판부에 제출한 3개 공문은 모두 위조됐다”고 밝혔다. 김씨가 위조한 공문은 이 중 하나로, ‘출입국기록 정황 설명에 대한 답변서’다.

 검찰도 국정원의 문서 조작 교사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당시 검찰은 중국 정부에 유씨의 출입국 자료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따라서 공식 경로로는 선양총영사관을 통한 문건 입수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이 증거 조작이라는 주장을 담은 변호인 측 문서가 법원에 제출된 지 일주일 만인 12월 13일자 공문을 입수해 제출한 것이 석연치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김씨가 입국하기 전 국정원이 그와 말을 맞췄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국정원은 지난달 문건 위조 의혹이 불거지자 “선양총영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발급받았다”(2월 16일)고 밝혔다. 그러다 같은 달 25일 검찰 진상조사팀에 보낸 답변서에서 “제3의 직원이 제3의 협조자를 통해 중국 측으로부터 입수했고 선양총영사관의 이모 영사는 이를 검찰에 전달만 했다”고 말을 바꿨다.

 김씨도 처음에는 “현지인을 통해 싼허 세관 측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라고 국정원의 입장을 반영한 진술을 했다. 그러다 대검 감정 결과 관인이 위조된 것으로 나오자 “국정원에서 부탁받아 위조 문건을 만들어줬다”고 진술을 바꿨다고 한다. 국정원이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검찰은 “김씨를 위조의 단독범으로 만들어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김씨가 수년 전부터 매달 활동비(월 300만원)를 받으며 국정원의 협조자로 일해 와 국정원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웠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씨는 과거 중국에 유학 온 국정원 직원을 통해 포섭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이 김씨에게 제공한 금품의 성격도 수사 대상이다. 이에 대한 국정원의 해명도 석연치 않다. “싼허 세관 공문 입수비용(1000만원)은 이미 지불했고, 유서에 나오는 1000만원은 다른 문건에 대한 대가로 요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씨가 지난달 23일 입국할 당시 “유우성씨와 관련한 기존 3개 문건과 다른 문건을 추가로 발급받았다”며 요청한 돈이라는 것이다. 국정원은 “추가 문건을 검토한 결과 위조 문건임이 판명돼 비용 지불을 거절하자 서운한 심경을 유서에서 표출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검찰은 국정원이 현지 해외요원과 또 다른 협조자를 통해 구했다는 나머지 2개 공문인 허룽시 공안국명의 ‘출입국기록’과 ‘발급사실확인서’도 위조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공문 3개 모두 유씨가 2006년 5월 23~27일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중국으로 나온 뒤 52분 만에 5월 27일~6월 10일 재차 방북했다는 내용을 입증하는 문서들이다.

정효식·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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