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서 띄우는 박노해의 평화메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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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세상은 '힘의 감동'을 믿지만 시인은 '감동의 힘'을 믿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가슴을, 영혼을, 진실을, 우리들 마음 깊은 곳의 울림을 믿고 거기에 가 닿고자 몸부림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고, 살아낸 만큼 쓰고 싶었고, 쓰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싶었습니다.

전쟁은 모든 인간을 미치게 만듭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병사들은 더 광기어린 폭력과 잔인성에 자신을 맡깁니다.

광기는 광기를 부르고, 그 폭력의 기운은 한 세대를 넘어서 인간성에 끈질긴 영향을 미칩니다. 힘이 곧 여론이고 무장력이 곧 정의라면,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른 삶의 원칙을 가르친다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이제 전쟁은 현실입니다. 우리는 부도덕한 전쟁 앞에 아무런 할 것이 없습니다. 나 개인의 무력감, 인간 정신의 무력감, 정의의 무력감에 휩싸여 우리는 TV나 바라보며 주가 영향이나 저울질하고 겉도는 삶의 이야기로 이 야만의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라크전이 끝나고 한반도 전쟁이 다가온다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생수와 라면박스 챙겨놓는 것뿐일지 모릅니다.

나는 이라크전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못난 내 나라의 현실이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라크인들과 고통을 함께하며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이도 없고 출가자(出家者) 집안이고 직장도 홀가분한 편이라 여러 벗들의 마음을 대신해서 나섰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쟁으로 이라크.요르단.이스라엘.쿠웨이트로 가는 모든 항로와 길들이 끊겨서 전장으로 가는 길조차 험로입니다.

안식년으로 인근 지역에 계시던 한 교수님이 요르단의 암만에서 이라크로 들어가는 길을 닦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들. 행여 제가 미워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이 있다면 이 시간 용서를 구합니다. 저의 잘못됨과 분노와 폭력을 돌아보며 내가 먼저 평화의 사람이 되고, 내 안에 평화의 축을 세워 평화를 나누다 쓰러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벗들 유난히 겁 많고 나약한 저를 위해, 아직도 흔들리고 떨고 있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2003. 3. 19 프랑크푸르트에서 박노해 올림

(전체 내용은 www.nanum.com의 '박노해 평화 메시지'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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