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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의 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세계의 관심을 독점하던 월남이 세계로부터 외면 당한 채 갑자기 국제적인 고아가 돼버린 비극이 생생해진다. 죽어가고 있는 월남을 빤히 보면서도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역설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세계의 병이라고 느껴진다. 미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수수께끼 말이다.
세계의 경찰노릇을 곧잘 해오던 미국이 미국답지 않게 무관심하였다는 데는 자기 이익이라는 너무나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을 향한 우리의 열기 찬 관심은 실망과 불신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고 갑자기 고독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날 무관심하였던 「우리」에게 새롭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무관심하였던 「우리」에게 돌아와 보니「우리」에게는 「우리」를 하나의 민족으로 묶어 왔어야했던 「책」이 분명치 않더라는 새로운 허무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밖으로는 우리의 관심이 과잉으로 표현되어 오는 동안,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하여왔던 것을 발견했다.
자기학대 증의 병이라고나 할까. 외국인 관광객이라면 무조건 친절하고 높은 관심을 쏟는 반면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외면하였고 또 무관심하였다.
이것이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파열했으며 「공동운명」이라는 역사성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교수와 학생, 지도자와 국민사이에 신뢰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은 채 우리는 수많은「프로그램」과 조직 속에 기계처럼 그리 생존해왔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위기는 물질문명의 결핍에서 온 것이 아니라 차디찬 무관심이라는 병이다. 그러나 이 역사는 이 무관심이라는 병 때문에 파멸될 수는 없다.
구원의 약은 관심의 회복이다. 관심이란 상대자의 존재에 대한 긍정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절대적일 수 있는 「나」가 「너에게」관심을 갖는 순간부터 「나」는 「너」와의 관계 속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회는 조직뿐만이 아니라 대화가 가능한 공동체일수 있게 된다. 또 한 국가는 생존만을 위한 집단뿐만 아니라 그것은 한민족이라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지는 미래의 운명은 누구도 점칠 수 없는 미지수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불안한 미래를 향해서 우리가 도전할 수 있는 한가지가 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 철저하게 관심을 갖는 일이다.
문제 투성이기에 오히려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 보려는 우리 공동의 관심 말이다.
밖과 위에로만 치솟았던 우리의 관심이 무관심하였던「너」에게로 향하는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자세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무관심」은 긍정이나 부정보다 더 무서운 병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자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야말로 새로운 대화의 길일 수 있으며 공동운명으로서의 이 민족이 서로 믿고 신뢰하는 공동체로 변화되어 가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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