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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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독자의 주목을 끌만한 문제작을 쓰느냐, 평범한 소재를 착실하게 형상화하느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자유지만 후자의 태도에서 작가다운 성실성을 더 느끼게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이달엔 한 인간의 인생이라든지, 서민의 생활현실 등 평범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 비교적 많았다.
곽학송의 『방어』(현대문학)는 소재를 낚시터에서 고르고 있다. 작중인물 「나」는 낚시친구 「김경수」한테서, 그가 밤낚시 하던 중에 건져낸 한 여인의 기구한 과거를 전해듣고 있는데, 작가는 여인의 과거를 3단계로 나누어 단속적으로 펼쳐주고 있다. 사창굴 창부의 행복을 찾으려던 세 차례에 걸친 시도가 번번이 실패에 돌아간 얘기는 흔해빠진 애화에 지나지 않으나 이상하게도 그 흔해빠진 얘기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단속적인 구성 방법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무리 평범한 소재라도 표현방법 여하에 따라서는 작품효과가 얼마든지 상승될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교훈이다.
그러나 그 여인을 곁에 두려는 「경수」에게 세 번째 남편에게 다시 돌려보내라고 권하고 싶어하는 「나」의 충동은 「경수」의 짐을 덜어주는 일은 될지언정 여인을 위한 구제책은 못된다는 점에서 불만으로 남는다.
박범신의 『우리들의 장례회』(월간중앙)는 어두운 물감으로 채색된 작품이다. 단순히 어떤 장례식을 다루었다는 뜻에서 작품이 어둡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작중 인물들의 모습이 어둡고 그들의 생활주변이 지겹도록 어둑침침하다는 것이다. 마장동 집을 불에 태워버린 다리하나 없는 「봉추」, 벙어리아내, 「장모」, 기억상실증에 걸린 나그네, 「세도댁」, 그리고 달려온 손자 「일성이」-하나갈이 볕들 날이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은 밑바닥의 서민이다.
그러나 그들 서로의 인간관계만은 따뜻한 인정에 의해서 굳게 맺어져 있다. 「봉추」는 벙어리 아내에 만족하면서 장모를 정성껏 섬겼는가 하면 장모가 숨을 넘긴 그 날 난데없이 찾아 온 나그네에 대해서까지 인정을 베풀고 있다. 작가는 그와 같은 인정 미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가혹한 「아이러니」를 그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장모의 장례를 위해 「세도댁」의 주선으로 가지고 온 나무 관에 장모 대신 나그네를 뉘게 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작가에게 한마디하고 싶은 것은 「아이러니」에 너무도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박광서의 『세속신부』(한국문학)는 오늘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과거 어느 때에 못지 않게 오늘날 많은 성직자들이 과감하게 여러 가지 부조리한 현상에 대해서 도전하고 있는데, 그러한 마당에서 작중인물 「이 신부」는 지탄받아 마땅한 성직자중의 한 사람이다.
신앙상의 어떤 신념이 허락하지 않아 오직 신앙에만 전념하기 위해 세속적인 일에 가담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의 자세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신부」처럼 30여년 동안 성직생활 중에 지방 교회당의 사제로서 십여 년이나 눌러 지내오는 동안 구호물자로 나온 밀가루를 팔아서 판공비로 돌려쓰거나 기업체의 사장과 친교를 맺거나 관공서와 가깝게 사귀는 따위의 속인 근성에 젖은 끝에 만사를 외면하고 거부하려든다면 그는 신의 이름을 빌어서 배를 채우는 위선자가 아닐 수 없다.
작중에서 「이 신부」를 보좌하면서 고민하며 회의에 빠지는 젊은 「홍 신부」에게서 하나의 양심을 읽는 반면에 「이부」에 대한 분노가 강하게 일어난다. 이 작품은 물론 허구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국외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가톨릭」의 세계가 그렇게 순수하고 그 고결한 풍토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증언의 의미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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