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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정갑영 연세대 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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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갑영 총장은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마음을 이 시에서 읽는다. [장진영 기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중략)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중략)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강은교(1945~ ) '우리가 물이 되어'

이 시를 만난 건 내가 조교수로 대학에 온 1986년이다. 그 시절, 우리 사회는 암울했다. 젊은이들은 조국의 민주화 현장에 뛰어들었고, 학교 상황은 교육이나 연구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했다.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흘렀으나 우리 사회는 갈등의 수준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 시는 그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갈등과 다툼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물이 되지 못하고 ‘불’로 달아올라 있기 때문이다. ‘불’로 부딪히는 세상은 모두 타버리고, ‘숯이 된 뼈’만 남지 않겠는가. 이 시에는 불로 황폐화된 세상에 물로써 희망의 생명을 불어넣어 ‘넓고 깨끗한 하늘’ 같은 세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강은교 시인은 우리 대학 동문이다. 하늘을 향해 늘 당당할 수 있는 양심을 희구하며, 세상 ‘가뭄’이란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그의 간절함, 맑은 영혼이 내 가슴을 흔들었다. 요즘처럼 갈등이 많은 세상에 오늘 하루만이라도 스스로 물이 되어 우연히 스치면 이웃에게 가벼운 미소라도 건네면 어떨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는’ 빗물이 우리 스스로 되어 보자.

정갑영 연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