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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누구나 서툰 여행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서툴어도 괜찮아. 그런 게 여행이니까.”

시험, 입시, 면접, 취업, 인사고과, 제안서, 소개팅… 사랑까지도 잘 해내야만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경쟁적인 일상. '열심히 하자. 조금만 더 버티자. 남보다 조금이라도 잘해야 인정받을 수 있잖아. 조금 더 참으면 좋은 날이 올 거야.' 이런 생각과 다짐에 익숙해지다 보면 때때론 여행까지도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은 이벤트가 된다.

패션지 피처 에디터 출신의 저자는 10년간 단 한 번의 마감 펑크도, 단 하루의 마감 연기도 없이 120여 권의 잡지를 만들었다. 주도면밀한 완벽주의자로 살던 어느 날, 책을 뒤적이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남긴 마지막 독백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난 왜 이렇게 모든 일에 서툴지? 총 쏘는 것도 제대로 할 줄 모르니 말이야.”

서툴다. 그 말에 울림이 있었다. 뭐든 잘하고 싶었던 욕심 뒤에 숨겨진 불안과 자기 부정, 정열의 탈을 쓴 자기 착취, 그리고 뒤따라오는 공허한 마음. 그날 처음으로 내면의 민낯을 들여다 본 저자는 반 고흐의 무덤에 찾아가기로 한다. 황홀한 미지의 땅, 첫 번째 유럽 여행에서 듣게 된 목소리.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그런 날도 있고, 그런 마음도 있는 법이야.”

‘보란 듯이 잘하는 여행’이 아니라 ‘미숙해도 괜찮은 내면 여행’의 매력을 깨달은 저자는 8년간 반복해 유럽을 찾았다. 이 책은 유럽 20여 개 도시의 여행기이다. 또 막막하기 짝이 없지만 인생의 중요한 세팅을 해내야 하는 골치 아픈 시기-스물넷부터 서른둘까지-를 겨우겨우 통과한 보통 여자의 솔직한 내면 고백이기도 하다. 감성적인 시선으로 유럽의 풍경을 담았지만 방황과 고민엔 보편성이 있다. 그때는 누구나 서툴게 나아가니까. 그렇게 맑은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수긍해 주고, 내려놓고 싶어 하니까.

<미드나잇 인 파리>의 프랑스부터 ‘꽃보다 누나’의 크로아티아까지,
내 여행 친구를 소개합니다

여행지의 사진과 모호한 단문으로 여백의 미를 강조하는 것이 요즘 여행 에세이의 트렌드이지만, 이 책은 다른 노선을 취한다. 단단하고 옹골지다. 전 세계 드라이버들이 로망으로 생각하는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 도로부터 ‘꽃누나’들이 감탄했던 크로아티아 비밀의 숲 ‘플리트비체’, 그리고 공짜라서 더 좋은 런던의 미술관 순례기와 브래지어를 벗어던진 프로방스 해변의 프랑스 언니들의 이야기까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유럽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피처 에디터 출신 저자의 취향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내 여행 친구’ 추천 리스트는 방랑벽을 자극하며 두근거림을 선물한다. 유럽 각 도시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나 그 도시 출신의 화가에 대한 이야기, 도시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책이나 음악을 권하고 있어 유럽 여행을 꿈꾸고 있는 여행자들의 가슴 설렘을 증폭시킬 것이다.

책 속으로

여행과 일상을 오가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여행을 한다는 건 실은 새로운 공간에 가 본다는 의미보다는 마음가짐의 모드를 바꾸는 일에 가깝다는 것. 여행자는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발견하고 느끼고 감탄할 ‘마음의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 자신이 가진 촉수를 최대한 열고 좋은 것들을 즐기겠다는 각오로 마음의 스위치를 탁 켠다. 그래서 별 것 아닌 작은 풍경에서도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작은 우연도 크게 감사할 줄 안다. 그런 마음의 모드로 일상을 살 수는 없는 걸까? 다 안다고 넘겨 버렸던 일상 속 풍경과 작은 우연 안에도 좋은 것들이 숨어 있지 않았을까? 여행자의 마음으로 매일 매일 살 수만 있다면 인생이 훨씬 더 풍요해질 텐데… - 《프롤로그》 p.12

이국의 길 위에선 누구나 초보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새롭게 자신을 채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조금 다른 눈을 뜬다. 앞으로 완벽에 대한 강박이 마음을 헝클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리라.
지금은 초보자가 되어 보는, 아주 좋은 시간이다. 불확실성과 ‘아직 미정’의 상태 안에서 발버둥치지 않고 머물러 보는 경험을 하는 아주 귀한 시간이다. 무능해도, 미숙해도 괜찮다. 지금은 그래야 할 시간이다. 이것이 여행이다. - 《서른둘 일월, 보르도 - 그냥 그래야 할 때 》 p.27

베니스가 내 단단한 경계심을 어떤 방식으로 깨닫게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의 씨앗을 심어줬는지 잊고 싶지 않았다. 여행 이후 변해 가는 내 모습을 들여다보고 기록하고 싶었다. 물론 내 본성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평생 지고 가며 어르고 달래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게 본성이라는 것이니까. - 《스물다섯 시월, 베니스 - 웅크린 작은 마음》 p.53

나의 근본, 나의 시작, 나의 힘, 나의 아킬레스건, 부디 안녕히. - 《서른둘 삼월, 파리 - 엄마라는 이름의 뇌관》 p.76

순간의 진실성을 믿지 않는 여행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스치는 사람과 풍경 안에 무언가 귀한 것이 숨어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면 애초에 여행이란 게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순간이 곧 진실이고 행복이다. 존 싱어 사전트의 그림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는 평생 수천 점의 초상화를 그리며 여행하는 기분으로 그리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 《서른둘 사월, 런던 - 미술관 페티시, 이유 있는 집착》 p.107

프로방스로 향하는 기차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오르고 싶었다. 철저하게 관광객이 되어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고, 자연의 축복을 온 마음으로 만끽하리라 다짐했다. 햇볕 좋은 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처럼 ‘으랏차, 이제 좀 어슬렁거려 볼까?’ 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이다. 마음이 훈훈해지는 작지만 확실한 기쁨을 채집하기에 프로방스만큼 좋은 곳은 없을 테니까. - 《서른둘 오월, 프로방스 - 행복, 날로 먹어도 될까요?》 - p.115

아이들이 야간자율학습을 하다가 도망가지 못하게 매일 밤 8시에 철문을 밖에서 잠가 버리는 야만적인 일이 벌어지는 학교라는 곳에서 하루에 15시간씩을 갇혀 지내야 했던 우리는 보부아르라는 이름을 꿈꾸듯 말했다. 그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그 안에 스며있는 세련, 도발, 자유, 불경 같은 것이 느껴졌고,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다. - 《스물넷 십일월, 오베르 쉬르 우아즈 - 그의 무덤 앞에서》 p.148

두 번째 증후는 연애지상주의자가 된 것이다. 여자가 남자와의 완벽한 소통을 기대할 때 얼마나 많은 신경증이 발현되는지 알게 하는, 바로 그 연애 말이다. 막 사랑에 빠질 때 느껴지는 그 간질간질한 설렘과 사랑받고 있다는 포근한 위로감도 물론 연애의 미덕이었지만, 그 시절 나에게 연애는 ‘내 마음 들여다보기 - 심화 코스 편' 같은 것이었다. - 《스물여섯 시월, 암스테르담 - 실연 여행의 결말》 p.163

병실에 며칠간 누워 내가 싸운 것은 수술 부위의 통증이 아니라 저 잔혹하고 나약하고 멍청한 내 마음이었다. 결국 깨달았다. 진짜 하자는 아픈 몸이 아니라 나를 평가 절하하는 그 마음이라는 걸. 아무리 몸이 멀쩡해도 저 마음을 갖고 산다면 나는 평생 아픈 사람으로 살게 될 거란 자각. - 《서른둘 팔월, 두브로브니크 - 흉터를 안아 주는 바다》 p.229

내 눈을 의심했다. '세계 제2차 대전 시절의 흑백사진 같은 데에서 봤던 비행기에 타다니. 이건 언제 떨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비행기야.' 기장이 시동을 켜자 프로펠러가 움찔 하더니 드륵드륵 소음을 내며 빠르게 돌았다. 꼭 깡마른 팔순 할아버지가 러닝셔츠에 반바지만 입고 나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전력 질주하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 《서른둘 팔월, 베오그라드 - 곁, 경계, 국경에서》 p.258

하지만 꿈도 사랑과 마찬가지였다. 단박에 이뤄지는 시원한 해결 따윈 없는 것이다. 신통치 않고 답답해도 그것으로부터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게 어쩌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동기부여의 전부일지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왠지 그 일을 떠날 수가 없는 작은 이유를 소중하게 단련하는 것. - 《서른둘 구월, 겐트 - 낭만적 밥벌이와 그냥 밥벌이》 p.333

저자 소개

글쓴이: 최혜진

198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첫사랑이 남긴 지독한 우울감을 라디오헤드의 음악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로 치유했다. 그 뒤론 늘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읽고 썼다. 박완서, 오정희 할머니의 글을 사랑하고 우디 앨런 할아버지와 친구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열아홉 생일 날, 부모님 몰래 혼자 부산으로 가 바다를 보고 왔다. 그때부터 아주 먼 곳, 바다 너머의 낯선 곳이 궁금했다. 20대의 거의 전부를 패션지《쎄씨》 피처 에디터로 일하며 몰아치듯 보냈고, 틈틈이 시간을 쥐어짜 국경을 넘는 여행을 했다. 월급쟁이 10년 차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왔다. 자연스러움을 덮을 만한 아름다움은 없다고 믿는다.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가벼워진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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