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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재불 아동심리학자 김양희 박사(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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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떻게 「파리」에는 왔으나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이른 새벽 「파리」역에 내린 그는 우선 싸구려 숙소부터 잡아야 했으며 공부고 뭐고 간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첫 날은 먼저 온 유학생들이 「라틴·코터」(「파리」의 학생가)의 중국 음식점에서 환영 「파티」를 열어주었다.

<대사관서 친절한 「폴」양 만나>
이튿날 그는 자선사업으로 외국 유학생들을 도와주는 「르노」신부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콜레트」로 2번지 7층 꼭대기의 지붕 밑 다락방을 하나 빌 수 있었다. 7층에는 5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부엌·변소·세면대 하나씩을 공동으로 쓰게 되어 있었다. 그나마 이런 방을 빨리 구할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겐 큰 다행이었다. 그래도 전쟁기간 동안 불군 부대에서 일했기 때문에 언어에 장애를 느끼지 않은 것이 큰 도움이었다.
그는 다시 「르노」신부를 통해 초등학교 기숙사에 가서 저녁이나 공휴일에 어린이들을 보아주는 「아르바이트」를 얻었다. 하는 일이라곤 싸움을 말리고 그냥 놀아주기만 하면 되었으며 더욱이 말을 훈련할 좋은 기회였다. 그래도 대학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어 9월까지 「소르본」대학에서 회화교육을 받았고 1년 동안 어린이 보기로 돈을 번 다음 1954년 9월 정식으로 「소르본」대학에 등록했다.
이때 그는 전공을 심리학으로 정했다. 원래는 문학을 지망했었지만 문학의 밑바탕에는 역시 인간의 심리가 깔려 있다고 느꼈고 어린이보기를 하다 보니 아동심리학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흔히들 「파리」는 낭만의 도시라고 하지만 간신히 고학으로 연명한 그의 대학 생활은 그런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행히 대학에 들어가면서 장학금을 받아 그런 대로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루브르」박물관 한번 구경 못 가고 다락방에서 책과 씨름을 했다.
55년에 심리학개론과 경험심리학을 수료하자 좀 자신이 붙었다. 그러나 이해에 장학금이 끊어져 다시 어린이보기를 시작해야 했고 여권기한이 만료되어 그 연장이 문제였다.
그가 여권연장 때문에 우리 대사관에 들렀을 때 그는 유난히도 친절을 베풀어준 한 「프랑스」아가씨를 만났다. 당시 「프랑스」주재대사의 비서였던 「폴」양이었다.
그가 영사를 찾으려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녀는 무얼 도와줄까 하고 먼저 묻더니 즉시 여권을 연장해와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것이 두 청춘남녀가 인연을 맺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그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 다음 밖으로 나왔으나 무엇인가 사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건너편 「카페」에서 전화를 걸고 신세를 졌으니 오늘 저녁에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폴」양은 쾌히 응낙, 그들의 첫 「데이트」는 간단히 이루어졌다.
이들은 영화를 본 다음 공원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폴」양이 그의 대학생활을 물어봤다. 그는 「프랑스」의 대학에는 등록금이 거의 없기 때문에 싸구려 학생식당(정부가 3분의2보조)에서 허기를 메우며 근근히 공부를 하고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학생식당에서만 먹다가는 영양실조에 걸린다면서 저녁에 집에 오면 솜씨는 없지만 한식을 마련해서 영양을 보충해 주겠다고 상냥하게 말했다. 이날의 「데이트」는 그로서는 재정적인 출혈이었으나 그래도 「파리」생활 2년만에 처음 맛본 낭만이었다.

<「폴」양과 남 불서 바캉스 즐겨>
이해 여름 그는 큰마음을 먹고 남 불에 「바캉스」를 같이 가자고 제의했다. 8월 한달, 지중해의 태양이 쏟아지는 「마르세유」「니스 「칸느」해안에서 이들은 숨김없이 뜨거운 사랑을 다져갔다. 「바캉스」에서 돌아온 「폴」양은 그를 식구들에게 소개했다. 부모들은 왜 하필이면 한국학생과 사귀느냐고 반대를 했다. 그러나 「폴」양은 어느 틈에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는 등 한국요리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후 그는 저녁식사는 학생식당 아닌 그녀의 방에서 자주 하게 되었으며 사랑 또한 깊이를 더해 갔다.
사랑의 저녁식사 왕래 수개월, 어느 날 그녀는 느닷없이 이처럼 왔다갔다할게 아니라 아예 결혼을 하면 좋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물론 사랑의 종착역은 결혼이긴 하지만 에게는 아무런 생활기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그는 좀더 싸고 좋은 방을 구하느라고 지붕 밑 다락방만을 찾아 이미 14번이나 이사를 한 신세였다. 더욱이 저녁에는 어린이들을 보아 주어야하는 일거리가 있었다.
1주일을 고민한 끝에 그는 거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폴」양을 만나 『학생거지나 다름없는 나 같은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불행을 돈주고 사는 바보짓이다』라고 간곡히 거절했지만 그녀는 『한번 말한 것은 취소하지 못하는 것이 이곳의 관습』이라고 하면서 당장 식을 올리자는 것이었다.

<결혼 미루자 처가서 호소까지>
너무나 강경한 그녀의 태도에 그는 「폴」양을 위해 다시는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그의 친척들이 합세해서 적극적으로 나왔다. 『돈이 무슨 문제냐. 「폴」이 돈하고 결혼하자는 게 아니다. 경말 「무슈」 김이 「폴」을 그런 여자로 안다면 유감이다…』이런 설득에 막 말을 끊기는 너무 무정한 것 같았다. 결혼문제를 결정하지 못한 채 1년 동안을 이런 신경전으로 보냈다.
이사이 그는 아동심리학과 교육학을 수료하는 등 학업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물론 「아르바이트」도 계속했다. 학업과 결혼문제가 겹쳐 정신적 부담은 커만 갔는데 어느날 그는 그녀의 부모가 집에 초대한 것을 말없이 가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튿날 그녀의 부모들이 7층 꼭대기 다락방까지 찾아와 『내 딸을 좀 살려 달라』고 오히려 호소했다고. 그가 초대에 응하지 않자 그녀는 울고불고 죽어버리겠다고 아우성을 쳤다는 것이었다. 그는 달려가 눈이 퉁퉁 부은 그녀에게 결혼을 약속했다.
56년8월30일 「폴」양의 가족만이 참석한가운데 「파리」 교외의 초라한 교회에서 간단히 식을 올렸다. 일부러 결혼날짜도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8월로 잡았다. 그후 꼭 1년은 처가살이를 했다. 부인은 한국대사관에 그대로 다녔고 그는 공부에만 열중했다. <파리=주섭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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