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만 교체 … 교묘한 개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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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교묘한 개악입니다. 일부 단어를 고쳤다고 해서 개선으로 볼 순 없지요. 침략전쟁의 책임을 명시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후소샤(扶桑社)판 역사교과서 2005년 검정신청본과 검정통과본을 비교.분석한 신주백(사진.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박사의 말이다. 그의 지적은 검정신청본과 검정통과본이 보이는 용어상의 차이를 일종의 '준비된 수순'으로 보는 한국 학계의 비판적 분위기를 대변한다.

신 박사는 "일본 역사교과서를 평가하는 기준은 2001년에 나온 현행판이 아니라 1997년의 교과서 검정 수준이어야 한다"고 했다. 위안부 문제를 적지 않고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은폐.미화한 2001년 판 자체가 문제인데, 2001년 판을 어떻게 2005년 판의 개선.개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뜻이다.

97년 일본에서 발행된 7종의 역사교과서는 모두 위안부 문제와 일제의 침략 사실을 썼다. 일본 교과서의 이 같은 '전향적 개선'에 반발해 결성된 우익단체가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고, 이 모임이 지원해 2001년 선보인 교과서가 바로 문제의 후소샤판 역사교과서다.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복속'(검정신청본)이라 했던 것을 검정통과본에선 '조공'으로 바꾸고, 또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일본'(검정신청본)이란 표현을 검정통과본에선 '조선의 근대화와 일본'으로 고친 점에 대해 신 박사는 "단어만 바꾸고 침략적 역사관은 그대로 유지하는 얄팍한 계산"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내용에선 조선이 청나라에 예속된 국가였다고 왜곡하고 있으며,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하는 데 공헌했다는 논조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서술 내용에 있어 달라진 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는 "일본서적신사(日本書籍新社)에서 출간한 중학교용 역사교과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조선 침략'또는 '대륙 침략'이라고 적고 있다"면서 "일본에 후소샤판과 같은 나쁜 교과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놓쳐선 안 된다"고 말했다.

신 박사는 또 일본 문부성이 만든 '중학교 학습지도요령'부터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러.일전쟁과 관련해 문부성은 '대륙을 둘러싼 국제정세'에서만 전쟁의 배경을 쓰라고 지시하고 있으며, 후소샤판 역사교과서는 문부성의 지도요령을 충실히 따라 러시아에 전쟁 책임을 떠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신 박사는 "82년 역사왜곡 파동 때 일본 정부가 국제 관계를 고려해 검정 기준으로 만든 '근린제국 조항'을 일본 정부 스스로 파기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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