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 89년 한국 축구 명장면 '다시 한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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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진흙탕이 된 그라운드 한쪽에서 한가로이 모이를 찾는 비둘기, 축구선수 펠레의 경기가 있던 날 서울운동장 성화대까지 빽빽하게 올라 앉은 관중, 허름한 여관방에서 간식으로 병 사이다를 마시고 있는 국가대표 선수들….

사진작가 박신광(朴信廣.59)씨의 앵글에 잡힌 20년 전 한국 축구의 풍경들이다.

1970년부터 89년까지 꼭 20년간 축구사진만 전문으로 찍어온 朴씨가 자신의 작품을 모아 사진전을 연다. 오는 27일까지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이마트 수원점에서 열리는 '추억의 한국 축구 사진전'이다.

고교 때부터 카메라를 만진 朴씨는 군 제대 후 '월간 축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유럽의 축구잡지를 보니 경기 장면 외에 그라운드 밖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를 절묘하게 포착한 사진들이 많았다.

朴씨도 이쪽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축구 사진집을 내겠다는 의욕도 컸다.

당시에는 사진기자가 적어 朴씨는 대표선수들과 '형님, 아우'하며 지냈다. 지방에서 시합이 있을 때는 숙소도 같은 여관을 썼다. "밤새 함께 술을 마시고 고스톱을 친 날도 많았어요.개인 사진도 많이 찍어줬죠."

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 대표팀이 고지 적응을 위해 마스크를 쓰고 훈련한 장면도 朴씨만이 찍었다. "당시 아무도 청소년팀에 관심이 없었는데 박종환 감독이 일러줘 알게 됐어요.청소년팀이 4강에 오르자 내가 찍은 사진을 얻기 위해 언론사들이 발칵 뒤집혔죠."

86년 朴씨는 날벼락 같은 후두암 판정을 받았다.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도 88서울올림픽 때 필름 2백통이 넘는 사진을 찍었던 朴씨는 89년 끝내 카메라를 놓고 수술대에 올랐다.

암세포가 퍼진 성대를 잘라내는 수술은 성공했지만 후유증으로 전신마비가 왔다. 아버지를 극진히 간호해 주던 외아들을 93년 교통사고로 먼저 보내는 아픔도 겪었다.

朴씨는 말할 때 목에 마이크 모양의 인공성대를 댄다. 그러면 만화영화의 로봇 목소리 같은 건조한 기계음이 난다.

모은 돈을 병원비로 모두 날리고 11평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朴씨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혼이 담긴 사진들이 영영 빛을 못볼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었다. 다행히 얼마 전 제우통상(사장 이광우)에서 한국 프로축구 20돌을 맞아 기념 사진전을 열자는 제의를 해왔다.

朴씨는 "이제는 제대로 된 축구 사진집을 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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