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실적 전망은 '양치기 소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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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지난해 말 증권사들은 국내 대표적 상장사 200곳의 4분기 영업이익(컨센서스)을 31조5000억원으로 전망했다. 뚜껑이 열리고 있는 지금은 어떨까. 전망치는 24조8000억원까지 내려갔다. 두 달 새 21.3%나 떨어뜨린 것이다. 통상 실적이 전망치보다 10% 이상 적게 나오면 ‘어닝쇼크(earning shock)’로 친다. 결국 한국 증시 전체가 어닝쇼크를 기록한 셈이다. 신한금융투자 이경수 투자전략팀장은 “전망이 빗나간 폭으로 보면 금융위기 때인 2009년 이후 최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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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이것도 여전히 부풀려진 수치일 가능성이 크다. 동양증권 김광현 연구원은 “전망치가 계속 내려가는 추세라 실제 나오는 이익은 그보다 더 적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동양증권에 따르면 현재까지 상장사 10곳당 8개꼴로 전망치에 못 미치는 4분기 실적을 내놓고 있다.

 ‘쇼크’의 파장은 지난해 실적에만 미치지 않는다. 증권사들은 올해 실적 전망치도 줄줄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 1분기 영업이익 전망치는 최근 한 달 새 5.5% 낮춰졌다. 올해 연간 전망치 역시 3.6% 떨어졌다. 특히 조선(-16%), 정유(-12.3%), 전자·부품(-11.5%), 생명보험(-10.7%) 업종은 두 자릿수 이상 급락했다.

 2012년 이후 쇼크는 실적 시즌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세계 경기침체에 기업 이익은 잘 늘어나지 않는데 증권사들의 추정치는 매년 올라갔다. 그러곤 시간이 지나면 추정치를 떨어뜨리길 반복했다. 지난해 초 증권사들은 200개 상장사의 2013년 연간 영업이익 총액을 150조원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이후 꾸준히 내려가 1년이 지난 현재 예상치는 119조원 수준에 그치고 있다. 올해도 증권사들은 두 자릿수 이상의 이익 성장세를 예상했다. 하지만 연초부터 신흥국발 위기가 덮치고, 중국 경기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이 또한 현실화되기가 만만치 않다는 지적이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국내 증권사의 전망이 빗나가는 정도는 유독 심하다. 신한금융투자에 따르면 올 1월 말 기준으로 최근 1년간 실적 전망치와 실제치를 비교해보니 국내 증권사의 정확도는 비교 대상 45개국 중 36위였다. 한마디로 낙제권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는 게 증권가의 해명이다. 수출이 주도하는 한국 경제에서 기업 실적은 해외 변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내수가 중심인 곳보다 실적 예측이 어렵다. 그런데 최근 2~3년간 미국의 양적완화, 유럽 위기, 중국 경기둔화 등 굵직굵직한 변수들까지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경수 팀장은 “특히 중국 변수가 미칠 영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게 전망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4분기의 경우 이른바 ‘빅 배스(big bath)’도 영향을 줬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대거 물갈이된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전임자가 쌓아놓은 부실을 한꺼번에 털어내면서 예상치 못한 손실이 불거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증권사들의 기업분석 능력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본시장연구원 황세운 자본시장실장은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의 실적 전망이 1조원이나 빗나간 건 아무리 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쇼크가 만성화되면서 부작용은 점점 커지고 있다. 주가의 관건인 실적 전망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투자심리까지 위축되고 있다. ‘과대 추정→어닝쇼크→전망치 하향→증시 부진’의 악순환이다. 신흥국발 불안이 진정되고 있지만 외국인이 국내 증시로 쉽게 ‘귀환’하지 못하는 데도 이런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증권 김용구 연구원은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좋고 수출이 늘 것이란 전망에도 외국인은 직접 눈으로 실적을 확인한 뒤에나 들어가겠다는 태도”라면서 “한국 증시를 마치 ‘양치기 소년’으로 여기는 듯하다”고 전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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