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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 피해라" 끝내 못 빠져나온 해병대 복학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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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버지는 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는 영안실 앞에서도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18일 김진솔(20·태국어과)씨의 빈소가 차려진 울산 21세기좋은병원에서 아버지 김판수(53)씨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저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어 저렇게 차가운 곳에 누워 있습니까.” [뉴스1]

경북 경주 마우나리조트 체육관 붕괴사고 현장에서 부산외대 미얀마어과 4학년 양성호(25)씨가 후배 학생들을 대피시키다 미처 피하지 못해 변을 당했다.

 현장에 있던 학생들에 따르면 미얀마어과 학생회장인 양씨는 체육관 지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 “피하라”고 소리치며 후배들을 먼저 내보냈다. 하지만 자신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양씨는 무너진 철구조물에 깔려 숨진 채 발견됐다.

 신입생 민경기(19)씨는 “사고 당시 각 학과 대표들이 출입구 쪽에 있었기 때문에 먼저 나갈 수 있었다”며 “하지만 양 선배는 고함을 치며 신입생들이 빠져나가도록 도왔다”고 말했다. 해병대 출신인 양씨는 이번 신학기에 복학할 예정이었다.

 양씨의 친구 신성민씨는 “매사 솔선수범하고 리더십이 있었다. 한 번은 어떤 사람과 시비가 붙었는데 일방적으로 맞는 사람을 도와줄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며 흐느꼈다. 양씨는 부산 용당여성의용소방대장인 하계순(52)씨의 아들이다. 2000년부터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한 하씨는 14년간 재난현장을 지킨 공을 인정받아 지난 연말에 소방방재청장 표창을 받았다. 양씨의 시신은 부산 침례병원에 안치돼 있다.

 이번 사고로 목숨을 잃은 부산외대 학생의 시신이 안치된 울산시 북구 21세기좋은병원도 18일 하루 종일 울음바다였다. 김진솔(20·여)씨 아버지 김판수(53)씨는 “학교를 믿고 애를 보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며 “학교가 폭설 속 행사를 말리지 않은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사고가 난 17일 저녁 딸에게 “재밌느냐”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딸의 응답은 없었지만 김씨는 “노는 데 정신 팔려 그런 모양이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딸이 설마 사고를 당했을 것으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솔씨의 고모(58)는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고모의 비타민 영양제까지 챙겨주던 아이였다”며 "이제 막 꿈을 펼칠 나이인데 안타깝다”고 했다.

18일 울산 21세기좋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김진솔(20)씨의 친구들이 오열하고 있다. [뉴스1]

 간신히 목숨을 건진 부상자와 가족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머리 등을 다쳐 경주 동산병원에 입원한 신입생 이훈협(19)씨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천장이 무너져 내렸는데 어떻게 피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학교와 총학생회 측의 안전불감증을 성토했다. 부상한 학생의 아버지인 이규한(48)씨는 “눈의 무게로 건물이 무너질 수 있음을 살펴보지 못한 코오롱의 안전불감증이 도를 넘은 것 같다”고 말했다.

 리조트에 있던 부산외대 학생 900여 명은 이날 오후 부산시 금정구 캠퍼스로 돌아왔다. 경찰은 이날 리조트와 부산외대 관계자를 불러 안전관리 준수 여부를 집중 조사했다.

홍권삼·이승호·고석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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