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농악에 홀려 춤꾼 반세기 … 굽은 발가락으로 남았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춤인생 5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하는 국수호 디딤무용단 예술감독. “몸 자체가 ‘언어’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반세기 춤꾼이 찾은 답은 ‘공간’이었다. 한국 춤극의 대가 국수호(66) 디딤무용단 예술감독이 한국춤 전용공간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자신의 춤 인생 50년을 맞아 다음 달 5~7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펼치는 기념공연 ‘춤의 귀환’ 무대를 통해서다.

 “객석과 멀찍이 떨어져 분리돼있는 서양식 프로시니엄(액자형) 무대에선 한국춤의 진정성이 죽어버립니다. 지루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이지요. 비슷한 이유에서 중국엔 경극 전용극장이 있고, 일본엔 가부키 전용극장이 있습니다.”

 13일 오후 서울 대치동 디딤무용단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우리춤의 정체성은 우리춤만의 ‘집’에서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춤의 귀환’의 무대는 오케스트라 피트 부분까지 앞으로 쑥 나와있어, 객석과 한결 가깝다. 새 무대에서 국 감독은 남자춤의 바탕이 되는 ‘남무’, 놋쇠로 만든 타악기 ‘바라’를 들고 추는 ‘바라승무’, 판소리 적벽가를 바탕으로 펼치는 남자 2인무 ‘용호상박’ 등을 선보인다. 그는 “50년 춤인생을 관조하는 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의 춤인생 원년은 전주농고 1학년 때인 1964년 무렵이다. 전북 완주군 비봉면의 토지개량조합장이었던 아버지가 “측량을 배워보라”며 권해 진학한 농고였다. 입학 첫 달 농악 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농악대가 인생 행로를 바꿨다. 농악은 가무악(歌舞樂)이 하나로 어우러진 퍼포먼스였다. 그는 장구를 연주하며, 동시에 춤 몸짓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춤을 잘 췄다. “초등학교 운동회때 단상에 올라가 아리랑을 춰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스승 복도 따랐다. 전주 권번의 춤사범 정형인 선생이 전주농고 농악대 지도를 했다. 삼현승무와 남무를 그 때 익혔다. 서라벌예대 무용과에 진학한 뒤엔 박금슬 선생을 만나 하루 10시간씩 춤을 추며 한국의 춤사위를 배웠다.

반세기 세월을 버선 속에 있었던 그의 발이다. 버선코 모양에 맞춰 네 번째 발가락이 늘 셋째 발가락 아래 자리 잡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연아·이상화 선수를 보면 ‘저 사람도 청춘이 없겠구나’ 싶어요. 친구와 커피 한 잔, 막걸리 한 잔 마실 틈이 없을 겁니다. 나도 그랬어요.”

 73년 창단한 국립무용단에 첫 번째 남자 무용수로 들어갔다. 당시 국립무용단 단장이던 송범 선생이 그의 멘토였다. 무용극 ‘왕자호동’ ‘원효대사’ 등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섰고, 80년대 들어서는 안무를 병행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뿌리’ 등 연극·뮤지컬 안무도 여럿 했다. 87년 만든 ‘디딤무용단’은 지금껏 행사 출연료만으로 자급자족 운영 중이다.

 99년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그의 춤인생은 승승장구했다. 그 해 그는 남제자 성추행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여파로 녹내장에 걸렸고, 2006년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처음엔 이가 빠지더니 눈에 이상이 왔어요. 간에 화가 쌓여 생긴 병이라더군요. 억울하지 않았다면 몸이 상할 만큼 화가 나진 않았겠죠. 그 화를 접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그는 말을 아꼈다. 대신 “시야가 좁아져 잘 보이지도 않지만, 단원들 동작 틀린 건 동물적 감각으로 바로 잡아낸다”면서 웃었다.

 그를 한평생 붙잡고 있는 춤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영혼의 양식”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하며 즐기는 기호품·장난감이 돼선 안되죠. 춤에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물음을 몸짓과 가락을 통해 던지는, 미래지향적인 정신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국수호=중요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 국립무용단 단장, 서울예술대·중앙대 무용학과 교수 역임. 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화합’ 안무.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총괄안무. 2003년 대통령 취임식 총괄안무. 춤극 ‘명성황후’‘오셀로’‘고구려’‘사도’ 등 창작.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