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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는 많은데 고전은 왜 이리 적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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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건 불조심이 아니라 독서다. 연암 박지원은 과유불급(過猶不及·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의 한 예외로 독서를 꼽았다. 많이 읽을수록 말과 글이 유려해지고 생각이 깊어진다는 거다. 그러니 독서를 단순히 대입 수단으로만 볼 게 아니라 평생 친구로 삼을 만하다. 하지만 숱한 고전과 쏟아지는 신간을 입시에 매달린 학생이 두루 섭렵하긴 힘들다. 이럴 때 참고하는 게 ‘추천도서 목록’이다. 특히 학교가 직접 선정한 추천도서 목록은 청소년 독서 습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학교, 특히 우수한 학생이 모인 자사고와 특목고는 어떤 책을 권하고 있을까. 열려라공부가 명문고로 꼽히는 전국단위 자율형 사립고 8개교(민족사관고·상산고·용인외고·인천하늘고·천안북일고·포항제철고·하나고·현대청운고)와 서울 내 특목고 7개교(대원외고·대일외고·명덕외고·세종과학고·이화외고·한성과학고·한영외고)에서 추천도서 목록을 받았다. 서울외고와 서울과학고에도 요청했으나 받지 못했다. 모아 보니 총 2101권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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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고·민사고 등 독서 프로그램 체계적

학교별 추천도서 수는 천차만별이다. 독서 관련 프로그램 편차도 크다.

 가장 적은 학교는 상산고다. ‘양서 읽기 연간 지도 계획’에 따라 1, 2학년에게 각 21권씩 42권을 권한다. 권수가 적은 대신 난도가 높다. 『군주론』(마키아벨리)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 『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 등이 1학년 책이다. 2학년은 『싯타르타』(헤르만 헤세)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 『징비록』(유성룡) 등을 읽는다.

 책 수는 적지만 독서 계획은 철저하다. 학기 중엔 1달에 두권씩 읽고 주제 토론을 한다. 여름방학 때는 2권, 겨울방학에는 3권을 읽게 한다. 학사 일정에 맞춰 책 내용과 수준을 조절한다. 예컨대 중간고사를 앞둔 4월 초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포리스트 카터), 기말고사를 치르기 직전엔 『성자가 된 청소부』(바바 하리 다스)처럼 읽기 쉽고 심리적 위안을 주는 내용의 책을 추천한다.

 민족사관고(180권 추천)와 인천하늘고(182권 추천) 도서 목록엔 교사 이름이 함께 실린다. 책을 추천한 교사를 밝혀, 학생이 책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면 교사를 찾아가 물을 수 있다.

 민족사관고는 독서 프로그램으로 매주 월요일 2교시에 하는 ‘사제(師弟)동맹 독서 시간’이라는 게 있다. 추천도서 중 교사가 학생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선정해 수업을 개설하고, 학생들은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수업에 참여한다. 현재 58개 강좌가 개설돼 학생 455명이 참여하고 있다.

 인천하늘고는 ‘아침독서’ 시간이 있다. 매일 수업 시작 전 20분을 독서 시간으로 빼둔 것이다. 아침독서용 도서 목록은 하늘고 교사가 62권을 선정했다. 나머지 122권의 추천도서는 신입생을 위해 고전과 교과 연계 도서를 골랐다.

 천안북일고는 철저하게 교과연계 도서로 추천도서 목록을 구성했다. 1학년 국어 시간에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을 배우는 시기에 맞춰 이 작가의 대표작 『당신들의 천국』을 읽게 하고, 중국 작가 루쉰을 배울 때 『아Q정전』을 추천하는 식이다. 국어만이 아니다. 전 과목 교과서를 단원별로 쪼개 연계할만한 도서 70권을 추천도서 목록으로 제시했다. 독서를 수업 심화 과정으로 삼은 거다. 한국사에서 ‘근대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단원을 배울 때는 『한국 근대사 산책』(강준만) 생명과학 교과에서 ‘생명과학의 이해’ 단원을 다룰 때 『과학콘서트』(정재승)을 권한다. 수업 시간에 독서퀴즈를 내거나 독서토론을 해 수행평가 점수로 반영한다.

대체 왜 추천했지

 추천 도서가 많은 학교들은 대체로 독서 관련 프로그램이 없어 아쉽다.

 가장 방대한 책을 추천한 학교는 이화외고다. 무려 289권이다. 다음이 용인외고(222권)와 명덕외고(210권) 순이다. 추천한 책이 많다고 꼭 다양한 분야 책을 권한 건 아니다. 또 독서 프로그램도 없다.

이화외고는 미션스쿨이라는 특성이 추천도서에도 나타난다. 『참회록』(성 어거스틴), 『새신자반』(이재철), 『쉽게 쓴 한국 교회 이야기』(이덕주) 같은 종교 관련 서적은 물론 『오늘 더 사랑해』(션·정혜영)처럼 유명인의 신앙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도 추천도서 목록에 있다. 이 4권은 이화외고에서만 추천했다.

대원외고는 추천도서 44권 가운데 영어 원서가 20권이다. 한글 책은 1, 2학년 따로 인문·사회·과학·예술 영역 4개 영역으로 나눠 3권씩 추천했다.

이 가운데 고전이라 부를만한 책은 『금오신화』(김시습) 『논어』(공자), 『삼국유사』(일연) 『문명의 충돌』(새뮤얼 헌팅턴) 4권 정도다. 고전을 제외한 나머지 책 가운데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백만장자의 이력서』(스티븐 스콧) 『물리를 알면 스키가 보인다』(데이비드 린드)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이영미) 『만득이의 물리귀신 따라잡기』(이공주복) 『골퍼와 백만장자』(마크 피셔) 『영어, 아무나 한다』(송승우) 『월드컵, 그 열정의 사회학』(안민석 외) 등 7권은 대원외고만 추천했다. 수준이나 주제가 들쑥날쑥한 데다 학생들이 추천도서를 읽도록 동기를 부여할만한 연계 프로그램도 없다.

 고전과 신간의 불균형은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추천도서 수가 많은 학교일수록 불균형은 더 심하다. 이화외고는 289권이나 되는 추천도서 가운데 고전으로 꼽을만한 책은 『사기』(사마천) 『뿌리』(알렉스 헤일리) 『종의 기원』(찰스 다윈)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게트) 등 50여권 안팎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넛지: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리처드 탈러 등)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1Q84』(무라카미 하루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 등 최근 베스트셀러가 다수다. 5개 학교 이상에서 공통으로 추천한 고전인 『당신들의 천국』(이청준) 『파리대왕』(윌리엄 골딩) 『위대한 개츠비』(스콧 피츠제럴드) 등도 이화외고에선 찾아볼 수 없다.

진보 성향 필진 쏠림 심해

15개 학교의 추천도서 목록에 자주 등장하는 저자는 누굴까. 1위는 리처드 도킨스다. 『이기적 유전자』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만들어진 신』 『눈 먼 시계공』 4권을 12개 학교 도서 목록에 올렸다. 한국 작가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다. 8개 학교가 추천했다.

 5개 학교 이상에서 공통으로 추천받은 작가는 총 30명이었다. 국내 작가가 절반이다. 조세희가 『삼국유사』의 일연과 함께 3위(8개 학교), 진중권·신영복·강준만이 공동 7위(7개 학교), 장하준·정재승·한비야·박경리·이청준·김구가 공동 13위다. 또 홍세화·유홍준이 『구운몽』의 김만중, 근대 시인 백석과 함께 공동 21위다. 국내 작가가 많은 건 나쁠 게 없지만 상당수가 동시대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건 짚어볼 일이다. 일연·김만중·백석·박경리·이청준·김구를 제외한 9명은 현역 작가다.

 게다가 황순원 작품을 추천한 학교가 단 두곳 뿐이라는 걸 감안하면 지나치게 과도하다. 그중 이화외고엔 ‘한국단편집’ 공동 저자로 이름이 오른 것이라, 그의 작품을 추천한 학교는 용인외고(『카인의 후예』) 뿐인 셈이다. 이광수·서정주 작품을 추천한 곳은 두 학교씩이다. 김승옥 역시 『무진기행』 한편만 한영외고·천안북일고·이화외고가 추천했다.

 중동고 안광복(철학) 교사는 “추천도서 목록을 만들 때 ‘저자와 텍스트 모두 10년 이상 검증해야 한다’ ‘최근 이슈를 다룬 책은 피한다’ 등 기본 규칙이 있다”고 설명했다. 최신 사회 이슈를 다룬 책은 이념적 편향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5개 학교의 추천도서에 대해 “정제된 맛이 없다”고 평했다. “추천도서가 반드시 고전일 필요는 없고 신간을 반영해야 하지만 그 신간조차 박제화된 느낌”이라는 것이다.

큐알코드를 찍으면 15개 고교 중 추천도서 수가 가장 적은 상산고와 가장 많은 이화외고 전체 도서 목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내의 현역 저자 이름만 놓고 봤을 때 진보 성향 저자 일색인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경인교대 박인기(국어교육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가파르게 진행하는 과정에서 진보 담론이 지식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게 됐다”고 꼬집었다. 황순원을 포함해 서정주·이광수·최남선 등이 추천도서 목록에서 실리지 못하는 데 대해선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가를 친일파 논쟁을 이유로 청소년 권장도서에서 뺀 건 지나치다”며 “역사와 문학을 보는 통찰력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있게 지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배문고 김보일(국어) 교사는 “저자의 이름만 보고 편향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박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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