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는 어디서 감시해야 하나|윤임술<한국신문 연구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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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잡지는 신문을 감시해야」라는 제목이 수일전 신문에 비쳤다.
「그렇다면 잡지는 무엇이 감시해야 하는가」라는 말도 나올 수 있다.
신문이 잡지에 감시를 당해야 한다면 잡지도 감시를 당하는 데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매스·미디어」의 여러 종류 중에서 제각기 우위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신문이 왕좌를 차지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신문이 대량 배포되고 90여년 동안 역사관을 바로 세워 온 덕택일 것이다. 역사관을 세워 온 긴 세월 동안 때로는 부분적으로 실수도 있을 수는 있다.
제작상으로 시간적인 촉박 때문에 순간적인 판단으로 가치판단이 다소 틀리는 일은 있을 수 있으나 그렇더라도 오늘의 실수는 내일이면 바로 보아 고쳐져 일관성 있는 제작을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신문이 어느 파에 소속되어 그 파만을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파의 소속된 신문하나만을 놓고 신문전체를 대표한다고는 물론 볼 수 없는 일이다.
갑파 또는 을파, 병파에서 나오는 여러 신문이 종합되어 여론형성이 되기 때문에 한 신문만을 놓고 판단하기란 힘드는 일이고 또 그것이 그 당시의 전체여론을 대표한다고는 볼 수 없다.
파 소속 문제는 잡지라고 해서 어느 파에 절대로 소속되지 않는다고 장담은 하기 힘드는 일이다.
신문이 순간적으로 다루는 것을 초점을 모아 잡지가 더 정확하게, 더 깊이 있게 논평하고 여론형성을 지도할 수는 있다. 그것은 잡지 폭이 제작 상으로 보아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잡지는 그 기능 면에서 사건을 초점화하고 의의를 해설해 주는데 기회가 더 많이 주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신문기자는 현장을 직접 달려가 시간마다 변화하는 사건을 보도한다. 그 보도 속에는 사건의 원인, 사건의 발생, 사건의 추이실상을 보도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잡지기자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가서 배경·정보 등 신문기자가 찾아내기 힘들고 미처 못했던 것을 종합적으로 초점을 모아 더 깊이 있는 사건의 해설자가 되기도 한다. 또한 잡지는 신문과 서적, 즉 책 사이에 위치하여 역사적 조망이라는 높은 위치에서 검토할 수도 있기는 하다.
또 하나 신문과 잡지사이의 기본적인 차잇점이란 신문은 한두 회의 전체를 대상으로 「어필」하고 거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든 일에 관해 조금씩이나마 취급을 해야 하나 잡지는 그 범위가 신문보다 좁아 어떤 층에 「어필」하기 위해 주력해야 하고 어떤 집단에 애호돼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양성 있는 잡지분야의 독자란 그 잡지에 더욱 매력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잡지문화 형성에는 그 과정상으로 보아 근본 동기부터가 신문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1891년 영국인 선교사 「올링거」가 만든 『코리언·리포지터리』(Korean Repository)나 일본에서 유학하던 우리 학생들의 『대조선 일본유학생 친목회보』라든지 1896년의 『대조선독립회 회보』등의 초기 잡지가 강한 정치적 성격을 띠었고 1908년대의 최남선의 『소년』지를 비로소 종합 잡지로 보는 견해라든지 구한말의 사회조사표에 나타난 『서우』지 같은 것이 3천부가 나갔는데 신문의 붓수가 겨우 1천5백부밖에 안 나갔다는 것 등을 감안할 때 신문과 잡지는 어느 의미에서는 너무나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일제의 공백기를 제쳐놓고도 해방 후 「두 사람만 모이면 잡지」 「세 사람만 모이면 신문」하던 때는 조선주보를 위시하여 민간·선봉·선구·백민 등 1947년에는 잡지가 1백24종(조선연감), 45∼50년대는 5백종이 넘은 시대가 있었다.
이런 시대의 잡지는 결코 신문을 감시할 수가 없었을는지 모른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견이 없을 수도 없을 것이나 적어도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신문이나 잡지가 우리민족사의 흐름과 운명을 같이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말끝마다 우리 자신을 비하해서 후진국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우리가 후진국이라고 자처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신문이 반드시 언론의 후진성이 있었고 잡지라고 해서 후진성이 없었다는 논리는 안선다. 제작상 시간적 여유를 가진다고 해서 후진성을 탈피하고 촉박한 시간에 제작한다고 해서 후진성이 따른다는 법도 없다. 선진이나 후진이란 것은 좀더 다른 차원에서 검토돼야 할 것이다.
언론의 후진성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잘 모르나 보기에 따라서는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후진성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신문을 감시하는 잡지보다 최근에는 오히려 잡지를 감시하는 신문이 더 많은 것 같다고 해서 과언일까. 요는 신문의 특성과 잡지의 장점을 상호 보완하여 바른 여론 조성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잡지가 신문을 감시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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