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과 문학』과 문학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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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조국」과「문학」이라는 두개의 개념이 접촉되어 하나의 주제로서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은 항용 어떤 위기적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 위기의 비중은 문학쪽 보다도 제1차적으로는 조국쪽에 주어지는 것이 통례이다.
도대체 국가가「조국」으로서 인식된다는 것부터가 하나의 비상적 상황의 징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파리의 예술인들은 위기가 닥쳐오면 자발적으로「프랑스」국민이 된다』는 어느 시인의 말과도 같다.
평상시에 있어서의 국가란 일반 서민의 일상 감각속에선 대체로 개인생활의 자유를 제약하는「굴레」쯤으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 어느시대 어느사회에서나 흔히 보는 거짓없는 현실이다.
그리그 그것은 특히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에 있어 마찬가지다.
국가가 추구하는 것이 질서라 한다면 문학이 추구하는 것은 자유라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질서가 다스리려 하는 것이「집단」생활이라 한다면, 문학의 자유란 궁극적으로는 인문의「개인」생활안에서 그 구현을 찾는다.
뿐더러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가 오직 집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대해서,문학을 낳는 창작은 오직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는데 특색이 있다.
정치는 무리를 모아서, 그리고 무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지만 문학작품은 필경 무리를 떠나서 혼자 쓰는 것이다.
문학인도 물론 국가생활의 테두리안에서 살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국가도 저마다의 문학을 그안에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인은 비록 평소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그들의 창작의 밀실속에서 개인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다가도 일단 그들의 삶의 테두리인 국가가 밖으로부터 그 존립을 위협받을 때엔『조국을 위해서』 붓을 들고, 또는 붓 대신 총을들고 일어선다.
이 때, 조국과 문학과의 접속은 자연스럽고 자발적이고 필연적이다.
나라를 잃었던 일제치하의 우리 문학인물이 그랬고,「나치」점령치하의「프랑스」저항문인들이 그랬고, 또는 6·25남침 당시의 종군 문인들이 그랬다.
그러나 위기의 비중이 이와같이 조국쪽에 있지 않고 거꾸로 문학쪽에 있을 때도 있다.
뿐만 아니라,조국의 위기라는 것이 한 세대에 한번 정도쯤 드물게 찾아오는 것인데 반해서 문학의 위기는 그와같은 국난과 관계없이 훨씬 빈번히 일어날 수 있다.
조국의 위기가 급성적이라 한다면 문학의 위기는 만성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의 위기는 국가생활의 테두리「밖」에서 만이 아니라 테두리「안」에서도 조성될 수 있을 뿐더러 더욱 문학자체의 내부에서 조차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솔제니친」의 조국의 위기는 그의 생애에 단 한번 대독전이라는 국난으로서 끝났으나「솔제니친」의 문학의 위기는 그 국난이 가신 다음에도 그가 그의 조국안에서 또는 밖에서 문학을 계속하는 한 그를 따라다니게될 것이다.
정치가 오늘의 현실에서 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려는 것인데 대해서 문학은 그 이상의 것을, 보다 나은 것을, 보다 바람직한 것을 찾는 이상, 국가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문학인의 비판적「거리」는 불가피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문학의 이같은 비판적거리가 국가안에 사는 문학인의 만성적 위기의 근원이자, 동사에 창조적 자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국가의 위기에는 문학인이 자발적으로「조국」을 위해서 동원된다 하더라도, 문학이 위기에 봉착했을때 조국은 별로 문학을 도와즐 수 가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결국 혼자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그의 위기도 개인의 자유를 끝까지 고수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무리를 모아서 무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문인협회가 개최했다는『조국과 문학』이라는 제하의「세미나」가 이 기본적인 사실조차를 등한시한 것은 그래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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