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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다른 김밥과 겉 다른 떡볶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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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값싸게 끼니 때우기용으로 먹는 음식에서 웰빙 먹거리로 김밥의 위상이 달라졌다. 몸에 좋은 현미를 넣고, 햄·어묵 대신 견과류를 넣기도 한다. 로봇김밥의 ‘알래스카크림치즈김밥’과 ‘생와사비 참치마요김밥’. (2) 직원과 함께한 리김밥 이은림 대표(왼쪽)

요리로 다시 태어난 김밥
#압구정역 인근의 한 김밥집

매장 입구 정면의 진열장. 알록달록한 색상의 종이에 ‘매콤한 견과류’ ‘버섯불고기’ 등 요리 이름이 써있다. 날 견과류와 구이 불고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모두 김밥 메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김밥 속 재료다.

#동부이촌동의 한 김밥 전문점 주방

매장에 들어온 여성이 주문을 하자 직원이 김 위에 밥을 얇게 펴바르기 시작한다. 그 위에 매콤한 고추장 양념 돼지고기볶음을 듬뿍 올리고 능숙하게 말아낸다. 언제부터 은색 쿠킹 호일에 쌓여있는지도 모른채 수북히 쌓여있는 김밥 하나를 검은 봉지에 넣어주는 프랜차이즈 김밥 전문점과는 다르다.

(1) ‘바르다 김선생’ 판교점 앞에 줄이 길게 서있다. (2) 여느 김밥집과는 분위기가 다른 ‘로봇김밥’. 매장 입구엔 로봇 모형이 있다. (3) 압구정 ‘리김밥’은 하루종일 사람들로 붐빈다.

 김밥. 천원짜리 한 장이면 살 수 있을 만큼 저렴한 데다 곳곳에 매장이 있어 한국형 패스트푸드로 불린다. 한때는 소풍날에나 먹을 수 있던 특별한 음식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 ‘김밥천국’ 같은 프랜차이즈 김밥 전문점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흔하고 싼 음식의 대명사가 됐다. 값이 싼 만큼 재료의 질은 떨어졌다. 김밥 속 밥이 지어지는 과정을 알면 차마 못먹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김밥전문점 ‘바르다 김선생’을 운영하는 죠스푸드 김동윤 전략기획실장은 “김밥은 영양소를 고루 섭취할 수 있는 웰빙 간편식”이라며 “하지만 가격 경쟁력만 내세워 싼 재료비에 음식 질을 우겨넣는 김밥 프랜차이즈가 속속 등장해 싸구려 음식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편의점표 삼각김밥은 김밥의 값싼 이미지를 더 확고하게 굳혔다.

 그러나 김밥의 지위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3~4년 전부터 웰빙을 내세운 김밥 전문점이 하나 둘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건강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웰빙김밥을 찾는 사람이 늘어난 데 따른 시장의 변화였다. 특히 지난해 ‘바르다 김선생’과 ‘고봉민 김밥인’‘찰스숯불구이김밥’‘로봇김밥’ 등 김밥을 전문으로 하는 고급 프랜차이즈가 속속 생기면서 새로운 김밥의 전성시대를 이끌고 있다.

 외식컨설팅 전문가이자 요리연구가인 문인영(34)씨는 “피자·치킨·떡볶이 등 식품 전체로 확대된 프랜차이즈 사업이 최근 프리미엄 김밥까지 확대돼 유명 김밥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됐다”분석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김밥 전문점이 ‘김밥천국’이나 ‘김가네’‘종로김밥’등 기존의 김밥 체인점과 가장 다른 점은 김밥의 ‘속’이다. 제육볶음, 돼지고기 숯불구이처럼 밥 한 그릇 뚝딱 비우게 만드는 요리를 넣거나 호두처럼 밥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색 식재료를 단무지·어묵·햄 대신 넣는 식이다. 또 전에는 값싼 슬라이스 치즈를 넣어 치즈김밥을 만들었다면 요즘 인기있는 집들은 크림치즈 같은 좀더 고급 재료를 쓴다. 또 합성첨가물을 뺀 건강 식재료를 사용한다든지, 탄수화물인 밥은 대폭 줄이고 속재료를 가득 넣기도 한다.

2011년 압구정역 근처에 문을 연 ‘리김밥’은 웰빙을 내세운 대표적인 김밥집 중 하나다. 리김밥 이은림 대표(44)는 “매일 먹어도 될 정도로 건강한 간식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김밥집을 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암으로 큰 수술을 받은 데다 본인도 큰 수술을 받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는 통에 자연스레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영국 유학 시절 김밥 파는 한국 반찬가게에 현지 사람까지 몰리는 걸 보고 김밥을 재발견하게 된 것도 계기가 됐다. 이 대표는 “김밥에 채소가 들어있다는 이유만으로 영국 사람들이 웰빙 푸드라며 좋아하더라”고 말했다.

 건강한 김밥을 만들겠다고 처음엔 파프리카와 견과류 등으로 속을 채웠다. 결과는 실패였다. 결정적으로 맛이 없었다. 재료간의 조화를 놓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파프리카와 당근을 함께 넣었더니 두 재료의 강한 식감이 부딪혀 씹기도 힘들고 맛도 없었다. 이 대표는 “건강에 좋은 다양한 재료만 많이 넣으면 맛있을 거라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게 매운견과류김밥과 버섯불고기김밥이다.

 백미 대신 현미로 만드는 곳도 있다. 2010년 목동 1호점을 시작으로 지난해 이태원과 압구정에도 문을 연 로봇김밥이다. 현미는 식이섬유와 리놀레산이 풍부해 다이어트는 물론 동맥경화와 노화방지에도 효과가 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싼 데다 찰기가 없어 김밥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로봇김밥은 현미의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찹쌀현미와 현미를 혼합했다. 혼합 비율을 찾기까지 여러 번 실패를 겪었다. 임현(37) 대표는 “모든 김밥에 현미를 사용하고 김밥 속재료는 5대 영양소가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며 “한 줄만 먹어도 로봇처럼 기운을 내는 김밥”이라고 말했다. 생와사비참치마요김밥, 알래스카크림치즈김밥, 갈비김밥처럼 다른 곳에 없는 독특한 메뉴도 많다. 독창적인 메뉴 개발을 위해 생각나는 재료는 모두 시도해봤다고 한다.

 지난해 동부이촌동에 문을 연 바르다 김선생(이하 김선생)은 김밥 한 줄 사려고 사람들이 30분 넘게 줄을 설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김동윤 실장은 “김선생 고객은 대부분 어린 자녀를 둔 주부”라며 “안전한 먹거리를 자녀에게 먹이려는 니즈와 맞아떨어졌다”고 설명했다. 이곳 김밥은 사카린과 MSG(글루탐산나트륨)·합성보존제·표백제·빙초산 등 식품첨가물을 넣지 않은 단무지와 무항생제 계란, 국내산 햅쌀로 만든다. 주문과 동시에 만들어 신선할 뿐 아니라 주방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좋은 식재료를 썼으니 얼마나 값이 비쌀까. 하지만 가격은 3000~5000원대로 기존의 김밥 프랜차이즈보다 크게 비싸지 않다. 들어가는 가짓수를 줄이고 주재료에 집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컨대 김선생의 매운제육쌈김밥은 어묵·계란지단·햄·우엉 등은 다 빼고 제육볶음과 상추를 넣었다. 김밥천국과 리김밥의 참치김밥은 각각 3000원과 3500원으로 큰 차이가 없다.

고급 음식으로 진화하는 떡볶이
#방배동의 한 음식점 주방

주방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오픈키친 안에서 커다란 팬 위로 불길이 치솟는다. 하얀색 조리복을 입은 셰프 4명이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다. 화려하고 값비싼 정통 프렌치 요리가 나올 것 같지만 완성된 음식은 떡볶이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매장

콩크리트의 거친 질감이 그대로 드러난 노출벽면에 패션쇼 영상이 끊임없이 상영되고 있다. 이동식 옷걸이에는 옷이 한가득 걸려있고 출입문 바로 옆 진열대 위엔 아기자기한 귀걸이·목걸이 등 액세서리가 있다. 흔한 패션 편집매장처럼 보이지만 이곳에 온 손님들은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테이블에 앉아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 즉석 떡볶이를 보글보글 끓이고 있다.

플레이팟의 셰프들. 웨스턴조선 헤드셰프를 지낸 이상학 셰프(왼쪽)와 일본식 디저트카페 ‘교토푸’ 서울 조리부 총주방장 출신인 박정훈 셰프.

 길거리 포장마차나 학교 앞 분식집에서 즐겨 먹는 간식인 떡볶이가 변하고 있다. 아니, 세상이 떡볶이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유명 셰프가 직접 요리하거나 떡볶이집 인테리어를 트렌디한 카페처럼 꾸미는 등 점점 고급화, 차별화하고 있다. 다양한 식재료를 결합한 새 메뉴도 속속 개발되고 있다.

 2011년 방배동에 문을 연 ‘플레이팟’은 최근의 이런 분위기를 주도한 초창기 떡볶기집 중 하나다. 유명 호텔 출신 셰프가 낸 첫번째 분식집이기 때문이다. 웨스틴조선 헤드셰프를 맡았던 이상학(42) 대표를 비롯해 일본식 디저트카페 ‘교토푸’ 서울 조리부 총주방장을 지낸 박정훈 셰프, 웨스틴조선 양식부 출신 박신우 셰프가 주방을 지킨다.

 호텔 출신 실력파답게 간단한 분식을 창의적 요리로 재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불 웍(wok)볶이’는 중화식의 매콤한 떡볶이로 꾸준한 인기다. 웍은 프라이팬과 달리 아래가 좀더 움푹한 중국식 화덕이다. 강한 불에 짧은 시간 볶아 양념이 떡에 다 달라붙고 국물은 없는 게 특징이다. 웍은 두께가 얇기 때문에 중국요리 특유의 풍미가 더해져 겉은 바삭하고 속은 더욱 쫄깃하다.

 이 대표는 “떡볶이나 돈까스 같은 간단한 분식도 제대로 숙련된 셰프가 만들면 확실히 다르다는 걸 이곳에선 느낄 수 있다”며 “식재료도 호텔에 들어가는 정도의 최상급을 쓴다”고 말했다. 그는 “식자재에 더 많은 돈을 쓰려고 접시나 컵 등 식기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대중적인 걸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음식 자체의 맛을 강조하기 위해 과도한 장식도 하지 않는단다. 이곳 단골들이 플레이팟을 분식과 레스토랑을 합친 분스토랑으로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다.

방배동 ‘플레이팟’의 호텔 출신 셰프들이 개발한 대표메뉴 ‘불 웍(wok)볶이’. 중국 웍(화덕)을 이
용해 센 불에 짧은 시간 볶아낸 떡볶이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빌라 드 스파이시’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20~30대 여성 입맛에 맞춘 떡볶이집이다.

 김창규(41) 대표는 “한국 여성이 대체로 좋아하는 음식이 떡볶이와 쫄면”이라며 “떡볶이는 후진 골목 분식집에서 값싸게 먹는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좋은 공간에 대한 욕구가 강한 젊은 여성을 잡기 위해 좀 더 차분하고 분위기 있는 떡볶이집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에 2011년 패션을 모티브로 한 떡볶이집을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그래픽디자이너인 김 대표는 패션을 전공한 아내와 함께 매장 구석구석을 개성있는 소품으로 꾸며놓았다. 일반 분식집에서 쓰는 스테인리스나 플라스틱 컵 대신 유리컵을 사용하고 소파 같은 고급스럽고 푹신한 의자를 비치한 것도 여심(女心)을 잡기 위한 장치다. 남자는 보통 음식맛을 중시하지만 여자는 외관에서부터 인테리어, 분위기, 음악, 의자 색깔 등 식당의 모든 걸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맛을 팽개친 게 절대 아니다. 다양한 입맛의 고객을 위해 재료를 직접 고를 수 있는 즉석 떡볶이를 주메뉴로 정했다. 손님 대부분 만족한다. 이곳을 찾은 김예람(24·강남구 역삼동)씨는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보니 분위기가 떡볶이집 같지 않게 너무 좋아 보여 일부러 찾아왔다”며 “즉석 떡볶이라 내 마음대로 토핑을 골라 먹을 수 있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한남동엔 사골국물 우려내듯 정성 들여 만든다는 떡볶이도 있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눈꽃 흐드러지다’다. 이곳에선 양파를 6시간 동안 끓인 물로 국물 떡볶이를 만든다 한다. 동맥경화나 고혈압에 좋고 익히면 자연적인 단맛이 나는 양파를 이용한 건강 떡볶이다. 잡다한 맛을 없애기 위해 어묵이나 양배추 등 다른 재료는 넣지 않는다. 함께 파는 빙수 역시 흑임자나 미숫가루 같은 몸에 좋은 재료로만 만든다.

 이재원(36) 총괄이사는 “건강과 위생을 최우선으로 한다”며 “떡을 매일 아침 딱 하루치만 배달받기도 하지만 양파물을 6시간 끓여야 하기 때문에 그날 준비한 물량이 떨어지면 손님이 와도 더이상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떡볶이는 사실 제대로 된 식당보다는 길거리 음식으로 더 친숙하다. 언제부터일까.

 『서울을 먹다』『미각의 제국』을 쓴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는 “조선시대에도 떡에 간장과 기름을 발라 먹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고추장 떡볶이는 1960~70년대 시작됐다”며 “고추를 대량으로 재배하는 농가가 늘고 값싼 정부미(米)가 시중에 팔리면서 떡 가공품이 늘어난 게 떡볶이가 지금의 서민음식이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이런 떡볶이가 보다 프리미엄화(化)한 시점은 2000년대 중반 분식 프랜차이즈인 ‘스쿨푸드’가 생기면서부터. 2005년 가로수길에 첫 매장을 낸 스쿨푸드는 분식이 아닌 카페 분위기를 내려고 인테리어에만 2억원을 투자했다고 한다. 식재료도 엄격하게 관리한다. 강지연 스쿨푸드 마케팅팀 대리는 “고추가루는 감칠맛이 나는 토종고추 ‘수비초’만 쓰고 매장물은 알카리수를 사용하는 등 고급 재료만 쓴다”고 말했다.

글=송정·심영주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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