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 타개의 고육책|마르코스 대통령의 정적 석방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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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자신의 57회 생일 선물로 「호세·디오크노」 전 상원 의원 등 5명의 정치범을 석방한데 이어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재판 없이 2년 동안 수감중인 그의 최대의 정적 「베니그노·아키노」 전 상원 의원과 접촉, 난국 타개를 위한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는 보도는 「마르코스」의 진의와 「필리핀」의 정치적 장래에 대해 몇가지 상반된 추측과 의문을 제기한다.
「디오크노」와 함께 석방된 정치범 4명은 정부 전복 혐의로 체포됐던 전 자유당 사무 총장이며 전 노동 상인 「엘루테리오·아데보스」, 전 공산당 지도자 「앙헬·바킹」, 1969년 대통령으로 출마했다가 패배한 후 미국으로 망명한 「세르효·오스메나」 전 상원 의원의 보좌관 「벤하민·깅고나」 및 반정부 음모 혐의로 체포된 「베니그노·아키노」 전 상원 의원의 처남 「안홀린·오레타」씨 등이다.
계엄 통치 2년을 맞은 「마르코스」 대통령이 자신의 독재 체제에 대해 내외로부터 죄어드는 압력을 이제 실질적인 체제 완화 없이는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것인지, 아니면 반대 세력의 한정된 활동을 허용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통치 기반이 강화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를 구별해서 속단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 두가지 해석에는 각기 그럴 듯한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아시아」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의 제 맛을 가장 진하게 봤던 「필리핀」에 「마르코스」식 체제를 하루아침에 이직하는 일이 결코 순탄할 수 없으며 그의 통치가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자신의 정권 유지에 역점을 둔 것이기 때문에 반 독재 도전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국민의 82%를 차지하는 「가톨릭·서클」로부터 정식 제기된 대정부 비판·민주화 요구의 움직임은 「마르코스」로 하여금 어떤 형태의 조처든 반응을 보여야 하게끔 유도했다. 지식인·학생·야당들로 구성된 반 「마르코스」 세력의 요구는 가깝게는 불법으로 구속된 「아키노」를 비롯한 5백 내지 1천여명의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계엄령을 철폐, 반민주탄압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산당 및 빈발하는 「테러리즘」으로부터 국민을 구하고 부패 일소와 체제 개혁을 단행,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필요 불가결하다고 내세운 「마르코스」의 계엄 정신은 자신의 장기 집권과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결과 이외에 별 새로운 것을 가져온 것이 없다는 것이다.
69년 재선된 「마르코스」 대통령은 72년7월 개헌에 의해 스스로 3선 할 수 있는 길을 트고 뒤이어 계엄령 (72년9월23일)에 의해 의회를 해산하고, 대통령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꾸었다.
그는 관선이나 다름없는 국민회의 (정원 3천5백명)를 끼고 헌법을 개정한 후 사법권까지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계엄 직후 「마르코스」가 취한 첫 조치는 정적의 대거 체포와 언론 탄압이었다. 그는 계엄령이 정하는 지침에 따라 언론을 엄격히 통제, 국내 「뉴스」의 타당성을 항상 외국 신문에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현상을 빚었다.
특히 국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아키노」에 대해서는 언론이 앞장서 그를 『순교자도 영웅도 아닌 범법자』로 여론화 시키도록 해 국민대 「아키노」의 반목을 유발시키려 했다.
그러나 계엄령 선포 때 「마르코스」가 내세운 공산당의 위협과 「신 사회」 건설은 각각 모순을 드러내었다.
전 국민의 10%에 해당하는 사람이 전체 부의 90%를 휘어잡고 있는 극심한 빈부 격차를 제거하기 위해 토지 개혁을 약속했으나 대지주의 반발 앞에 「제한 적용」이란 편법을 택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마르코스」가 주장한 반란 위협은 중공의 조종을 받고 있는 신 인민군 (NPA)들로부터 보다는 해방 독립을 요구하는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 한 「모슬렘」 교도들로부터 더 거세게 나타났다. 또 독립 후 거듭된 정치·경제적 혼란 속에서도 헌정 질서의 붕괴만은 피해왔던 민주적 전통에 젖어온 국민, 그중 특히 지식층과 「가톨릭」 교도들에게 「마르코스」의 인권 탄압은 많은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불안이 있음에도 불구, 「마르코스」가 이제까지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힘은 어디에서나 오는 것일까. 우선 그는 후진 독재 정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병력을 5만에서 10만명으로 증강시킨 군부와 밀착, 이들을 「파워·엘리트」로 끌어들임으로써 비조직적인 반대 세력을 누를 수 있는 조직적인 힘을 갖고 있음을 들수 있다.
또 강대국들의 해빙에 따라 「필리핀」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있는 미국이 전처럼 타국의 내정에 지렛대 구실을 하지 않으려 한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된다. 오히려 「필리핀」은 월남전후 미군을 전혀 감축하지 않은 유일한 「아시아」 국가로서 자국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지원이 별로 줄지 않아 「마르코스」는 근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비교적 쉽게 견뎌낼 수 있었다.
「마르코스」의 입장을 강화해 주는 요인은 예기치 않았던 경제 분야에서 왔다. 72년9월 이후 중공과 관계 개선을 꾀해 72년 양국 교역량 3백만「달러」를 73년에는 8백만「달러」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동구 6개국과도 관계 정상화를 이룩함으로써 해외 시장을 확대하고 무역 증진을 가져온 결과 국민 소득을 1백「달러」정도에서 1백40「달러」로 향상시킨 것도 일반 대중의 반정부 감정을 다소 완화시키는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계엄 통치 2년의 이상과 같은 결과를 놓고 「마르코스」는 이제 반대 세력의 협조 없이 더 이상의 안주가 어렵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뜻에서 정적의 석방을 단행한 그의 최근 조치는 「압력」과 「자신」이 반반씩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전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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