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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 전설, 15세 열혈 소녀팬 편지가 도화선이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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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23면

CBS 인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진행자인 에드 설리번(가운데)과 함께 포즈를 취한 비틀스. 미국 시청자들은 1964년 2월 9일 일요일 에드 설리번 쇼를 통해 비틀스의 라이브 무대를 처음 접했다. 미국 첫 방송 50주년 기념일인 오늘(2월 9일)도 일요일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사진 유니버설뮤직]

처음부터 장밋빛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절망 쪽에 가까웠다. 영국에서 비틀스의 인기는 최고조였다. ‘비틀매니어(Beatlemania)’는 대세였다. 하지만 비틀스에게도 세계 최대 규모의 음반시장인 미국 진출은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1963년 9월 미국에 사는 누나 루이스를 만나고 막 돌아온 조지 해리슨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기는 고사하고 존재감조차 전혀 없음을 현지에서 체험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비틀스 미국 상륙 50주년 …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재구성

미국 음반 시장 역시 비틀스를 외면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계속되는 판매 신기록 행진에 고무된 음반사 EMI는 미국 내 비틀스 음반 발매를 위해 그들의 미국 파트너인 캐피톨 음반(Capitol Records)을 꾸준히 설득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비틀스는 미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작은 인디 음반사인 비제이(Vee Jay)와 스완(Swan) 등을 통해 싱글음반을 발표하며 미국 시장 진출을 노렸지만 철저하게 외면받는다.

“미국인 입맛엔 안 맞아” … 냉담한 미국 업계
미국의 국내 상황도 비틀스에는 도움 될 것이 없었다. 미국 언론은 영국의 상황을 다루면서도 비틀스의 인기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기사 일색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1월 22일 암살되면서 충격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영국의 4인조 밴드는 전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가질 것은 다 가진 미국이라는 경제부국에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폴 매카트니의 생각은 어쩌면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끝까지 낙관적이었다. 낙관적이지 않았다면 적어도 집요했다. 그는 비틀스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이었다.

영국에서 원격으로 미국과 연락해봐야 큰 소득이 없음을 간파한 브라이언은 11월 4일 ‘이번이 아니면 끝이다’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뉴욕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방문을 통해 비틀스의 운명과 로큰롤의 역사를 바꿀 2건의 계약을 성사시킨다. 첫번째는 미 CBS방송의 인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Ed Sullivan) 쇼에 비틀스가 세 차례 출연하는 계약이었다. 3회에 모두 주(主) 출연자로 나온다는 등 세부 조건이 따랐다. 두번째 계약은 미국에서 캐피톨이 비틀스 음반을 발매한다는, 꿈에 그리던 내용이었다. 영국에서 발매 직전인 싱글곡 ‘I Want to Hold Your Hand’ 음반을 직접 가지고 캐피톨을 설득한 결과였다. 브라이언은 이번 싱글이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을 것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캐피톨 측은 여전히 비틀스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브라이언의 끈질긴 설득에 ‘그럼 음반을 한번 내보기나 하자’는 식으로 발매를 약속했다. 발매 일자도 1964년 1월 13일로 확정했다.

비틀스 현상에 깜깜했던 미국인들
비틀스와 캐피톨에 1월 13일은 고3 학생의 수능시험일 같은 날이었다. 모두가 이날을 바라보고 남은 기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15살 소녀에 의해 이들의 계획은 전면 수정된다.

미국 메릴랜드주에 사는 마샤 앨버트라는 이름의 소녀는 63년 12월 10일 CBS 모닝 뉴스를 통해 영국의 비틀매니어 현상을 알게 된다. 마샤는 바로 지역 내 WWDC 라디오 방송에 편지를 보내 “왜 미국에서는 비틀스 음악을 들려주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이 편지를 받은 DJ 캐럴 제임스는 미국 내에서 비틀스 음반 구매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영국항공 승무원에게 부탁해 ‘I Want to Hold Your Hand’ 싱글음반을 입수해 17일 미국에서 최초로 소개한다. 마샤도 초청돼 스튜디오 안에 함께했다.

WWDC의 방송은 다른 라디오 방송들을 자극했고 이 노래는 불과 며칠 안에 미국 전역에서 소개되고 있었다.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캐피톨은 결국 싱글음반 발매 일정을 1월 13일에서 12월 26일로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공장은 24시간 가동에 들어갔다. 경쟁 음반사인 RCA 빅터사(社)에 음반 제작 주문을 부탁할 정도였다. 이즈음 캐피톨 사내에는 회사에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받을 때 “안녕하세요 캐피톨입니다. 비틀스의 새 음반이 조만간 발매됩니다(Capitol Records·the Beatles are Coming!)”하고 말하도록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비틀스의 미국 내 공식 첫 음반 ‘Meet the Beatles’(왼쪽 사진). 백스테이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비틀스.

파리 공연 중 접한 ‘빌보드 1위’ 소식
파리에서 공연 중이던 비틀스는 1월 17일 호텔방에서 브라이언이 캐피톨 측에서 막 받아 든 따끈한 전보 내용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자신들의 미국 내 첫 싱글인 ‘I Want to Hold Your Hand’가 인기 팝 차트인 캐시박스(Cashbox)에서 1위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이 곡은 2주 뒤 마침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다. 캐피톨은 비틀스의 미국 내 첫 공식 LP인 ‘Meet the Beatles!’를 1월 20일 발매한다.

64년 2월 7일 미국행 … 공항은 인산인해
첫 미국 방문길에 오른 비틀스를 태운 팬암(Pan Am) 항공 101호기가 런던 히스로 공항을 이륙했다. 대서양 위에서도 비틀스는 여전히 미국에서의 성공에 대해 자신이 없다. 두 달 전 암살된 케네디 대통령을 추모하며 JFK 공항으로 막 개명된 공항에 착륙할 즈음 기장은 “공항에 많은 팬이 나와 있다”고 귀띔한다. ‘많은 팬’이라는 단어는 비틀스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이미 영국에서도 많은 팬에 익숙한 비틀스라 그들은 기장의 말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존 레넌과 링고 스타 등 멤버들이 비행기 안에서 창 밖을 보는 순간 그들 자신도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두 달 전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이들을 보기 위해 4000여 명의 팬들이 공항에 모여 조금이라도 비행기에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비행기에 동승한 존의 당시 아내 신시아(Cynthia)는 “팬들의 고함 소리가 너무 커 엔진소리인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팬암 터미널에서 200여 명의 기자들이 참석한 기자회견을 마치고 시내 호텔로 향하는 리무진 안에서 “비틀스가 막 공항을 떠나 시내로 출발했다”는 생중계를 라디오로 들을 때 비틀스는 비로소 자신들이 미국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비틀스가 투숙한 플라자 호텔에 이들의 객실은 실명으로 예약이 돼 있었다. 인터넷이나 SNS도 없던 시대에 이 소문은 금세 뉴욕시에 퍼져 나갔고 경찰은 몰려드는 팬들과 몸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밴드는 오후 4시를 지나 체크인한 뒤 휴식을 취한다. 존은 영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다양한 라디오 음악 방송에 푹 빠져 밤새 로네츠(Ronettes)와 마빈 게이(Marvin Gaye) 등의 음악을 방송사에 직접 전화해 신청했다.

비틀스가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가 열리는 스튜디오 앞으로 모여든 비틀스 팬들.

엘비스 프레슬리 “미국 진출 축하” 전보
조지가 38.8도에 이르는 고열 증세를 보인다. 역사적인 공연으로 기록되는 에드 설리번 쇼를 하루 앞두고 리허설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다른 멤버들은 언론 인터뷰와 리허설 일정을 소화한다. 뉴욕 시내에서 존의 요구로 일행은 흑인 음악의 산실인 할렘 지역의 유서 깊은 아폴로 극장 앞을 지나갔다.

에드 설리번 쇼의 생방송 출연을 앞두고 대기실에 있던 비틀스 멤버들 앞으로 붉은색으로 ‘긴급’이라고 적힌 전보가 도착한다. 폴이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리자 멤버들이 경악한다. “미국에 온 것을 축하한다. 행운을 빈다”는 내용이었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로큰롤의 영원한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2월 9일 일요일, 출연 방송 시청률 58%
728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에 5만여 명이 입장을 신청했다. 비틀스는 계약대로 오프닝에 나와 ‘All My Loving’ ‘Till There Was You’와 ‘She Loves You’ 등 3곡을 불렀다. 그리고 클로징으로 다시 나와 ‘I Saw Her Standing There’와 ‘I Want to Hold Your Hand’ 등 2곡을 불렀다. 대다수 곡들이 폴 중심이었고 방송 화면에도 폴이 중점적으로 부각됐다.

방송 직전 비틀스도 이 방송이 분명 자신들의 경력을 바꿀 것이라고는 생각했겠지만 로큰롤 역사까지 바꾸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미국 내 TV가 있는 가구의 58%가 이 방송을 시청했다. 시청률 조사기관 AC닐슨 조사 결과 7300만여 명이 이 방송을 지켜봤다. 당시로서는 역대 최고기록이었다. 미 경찰 당국은 방송 당시 미국 내 범죄 발생률, 특히 청소년 범죄 발생률이 감소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비틀스 2주일 방미 … 로큰롤 세상 개벽
월요일 조간신문에서 비틀스 기사는 여전히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비틀스에 대한 주변의 시선이나 관심, 그리고 대우는 우호 그 이상이었다. 이들은 이미 전국구 스타였다. 11일 워싱턴DC에서는 이들의 첫 대중 공연이 콜리시엄(Coliseum)에서 열렸다. 직후 주미 영국대사관에서 열린 비틀스 축하 리셉션 행사에서는 팬들이 밴드 멤버 머리를 가위로 잘라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로큰롤 아티스트로는 처음으로 뉴욕의 카네기홀에 서기도 했다. 엘비스도 서보지 못한 무대였다. 두 차례 공연을 가진 비틀스는 공연 사이에 차이콥스키나 라벨 등이 쉬었던 같은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는 에드 설리번 쇼에 방송될 공연 장면이 녹화됐다. 며칠 뒤 세계 복싱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게 되는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와도 만나 인상적인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이들이 영국을 떠날 때 공항에 나온 팬들은 4000여 명이었다. 하지만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2월 22일, 공항에는 떠날 때보다 3배나 많은 1만2000여 명의 팬들이 나와 이들을 반겼다.

비틀스의 첫 미국 방문.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 짧은 2주는 로큰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장면으로 꼽히며 이름하여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으로 기억되고 있다. ‘미국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 4인조 밴드가 남긴 대중문화 유산치고는 참으로 큰 유산이다.



조현진 YTN 기자아리랑TV 보도팀장을 거쳐 청와대에서 제2부속실장을 역임하며 해외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1999~2002년 미국의 음악전문지 빌보드 한국특파원을 역임하며 K팝을 처음 해외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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