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브 영전을 계기로 본 미국무성 창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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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워싱턴=김영희특파원】「필립·하비브」주한 대사의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무 차관보 영전으로 한국은 오랜만에 국무성 안에 낯익은 고위 관리를 갖게 되었다. 외교라는 것이 국익의 타산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 이상 국무성 관리 중에 한국과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 있건 없건 그것이 대세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로저즈」국무장관 시절만 해도 그렇다. 「로저즈」가 장관으로 있고 그 밑에 「알렉시스·존슨」(전 주일대사)이나 「윌리엄·포터」「라셜·그린」「윈드롭·브라운」과 같은「서울 출신」들이 차관 또는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와 부차관보로 있을 시절에는「워싱턴」∼서울간의 공식 접촉의 테두리 밖에서 김동조 대사가 즐겨 가진 「골프」장의 대화는 국무성의 분위기 탐지에 큰 역할을 했다. 「골프」를 즐기고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를 가진 「로저즈」가 물러나고 「세계의 대통령」인양 바쁘기 만한 「키신저」가 국무장관이 되고부터는 서울의 외무부나 「워싱턴」의 한국 대사가 「키신저」와 사교적인 접촉을 가질 기회는 완전히 봉쇄되고 말았다. 「골프 대사」로 불리던 김동조 장관을 계승한 사람은 「세미나 대사」함병춘씨이다.
그동안 일본이나 한국에서 대사를 지낸 사람들이 많이 출세를 했는데 주일 대사를 지낸「잉거솔」은 이제 국무 차관으로 승진했고 주한 대사를 지낸 「포터」는 차관을 거쳐 주「캐나다」대사, 「그린」은 차관보를 거쳐 주호 대사, 「브라운」은 부차관보를 지내고 은퇴했다.
함대사의 취임을 전후하여 「서울 출신」「지한파」가 국무성 고위층에서 모두 물러난 것은 한국을 위해서는 대화를 위한 「파이플라인」의 두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외무부나 함 대사는 주일 공사를 지낸 「아시아」·태평양담당 부차관보 「스나이더」한 사람과 일본주재대사를 지낸 「잉거솔」차관보를 국무성의 「창구」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국무성 한국 담당관 「래너드」는 함대사를 「잉거솔」에게 소개할 때 『함 대사는 「골프」도 칠줄 모르고 술도 마실 줄 모르며 담배도 피울 줄 모르는 첫 한국대사』라고 말했다. 「골프」·술·담배와 인연이 멀기 때문이 아니라 국무성 고위층에서 「서울 출신」들이 일제히 전출되는 바람에 함 대사는 국무성 고위 관리와의 사적인 사교 접촉의 길을 트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함 대사는 차라리 각종 「세미나」참석에 한층 열중하는 인상이다. 국무성의 고위 관리가 하필 「골프」장의 「필드」나 「샤워·룸」에서 한국대사와 대단한 국사를 논할 턱이 없지만 「사교」가 뒷받침된 「공교」가 공식 접촉에만 의존하는 외교보다야 성과가 클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비브」의 국무성 영전이 한국에는 환영받을 만하다. 「히비브」는 「베트남」협상 때 이후 「키신저」와는 상당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비브」가 상대라면 한국 정부는 「설명의 노고」를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입장을 보다 많이 이해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워싱턴」에서는 「하비브」가 박 대통령에게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그래서 박 대통령 쪽에서도 「하비브」를 좋아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하비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최근에 와서는 한국 정부한테 세뇌 당하여 국무성의 한국 실무자와 감각의 차이를 빚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의회의 증언에서 한국 문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안보문제」가 무엇보다도 우선 한다고 말한 「키신저」의 발언을 보면 국무성의 정책「라인」과 「하비브」의 입장간에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금년말에 미국무성한국과가 몽땅 바뀐다. 한국 담당관 「레너드」는 제2인자 「뉴솜」과 함께 은퇴한다는 소식통 이야기이고, 나머지 두 사람의 직원 중에서 한 사람은 전출되고 한사람만이 남는다. 「하비브」의 차관보 취임이 없었더라면 한국 문제에 관한 한 국무성에 큰 공백이 생길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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