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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제39화 범죄감식(2)|<제자 김구현>김구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국인 형무관>
조선총독부 법무국행형과 지문계에는 판임관 6급 상당의 주임 밑에 10명 내외의 직원들이 있었지만 초기에는 모두 일본인들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실상 지문계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941년12월 일제가 미·영 등 연합군에 대하여 전면전쟁을 도발한 뒤부터였다.
전쟁으로 인적·물적 자원이 총동원되고 인력이 모자라자 일제는 할 수 없이 한국인들을 데려다 감식업무에도 채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으로는 전 서울형무소장 백흥영씨를 비롯, 작고한 전 서울형무소 서무과장 이경현씨·유길호씨(농장경영 중) 등이 처음으로 들어갔고 그 뒤에 당시 형무관학교를 졸업했던 송한식(현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김완식(전 충주경찰서장)·오창근씨가 잇달아 지문계에서 일하게됐다.
이들은 모두 형무관으로 파견 근무발령을 받아 지문계에 배치됐다.
지문계는 현 중앙청건물 4층에 있다가 나중에 중앙청 뒤뜰 별관으로 옮겨갔다.
일본인주임들은 한국인직원들이 독립투사들의 지문 원지를 빼돌리거나 기재사항을 고치지 못하도록 철저한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다.
특히 1940년에 주임으로 온 일본인 유마군길은 한국인직원은 면회를 와도 외부에 나가서 만나게 하고 자신은 출입문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서 출입자들을 하나하나 감시했다.
유마 주임은 한국인직원들에게는 원지의 도난을 염려한 나머지 숙직도 시키지 않았고 퇴근할 때는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원지 보관함의 자물쇠를 잠그고 맨 나중에 나갔다.
지문계 직원들은 지문의 형상에 따라 번호를 매기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는데 이 번호를「아다히」라고 불렀다. 이 말은 당시 지문분류를 맡은 직원들 사이에만 사용되던 일종의 은어라 하겠다.
유마 주임은 한국인 직원들이 매긴「아다히」도 퇴근시간 후에까지 남아서 일일이 검사한 뒤 보관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지문취급은 숨은 일이라 온종일 외부와 접촉할 기회가 드문 따분한 일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재미있는 일은 있게 마련이었다.
l944년 봄이었다. 하루는 서대문형무소에 부녀자 5백 여명이 무더기로 수감됐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수용되자 지문을 찍기 위해서는 형무소 간수들만으로는 손이 모자라 지문계에까지 차출명령이 떨어졌다.
당시에도 여자감방은 특정한 직원을 제외하고는 남자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된 남성금지구역이었다.
여자의 지문을 찍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행형과 지문계 직원들은 호기심에서 서로 내가 가겠다고 자청하고 나서 자못 치열한 경쟁까지 벌어졌었다.
10여 차례에 걸친 가위 바위보로 승부를 겨룬 끝에 마침내 앞서 말한 송한식씨가 차출의 행운을 차지했다.
여죄수들의 보드라운 손목을 잡아본다는 호기심에서 서대문형무소로 갔던 송씨는 하루종일 여죄수들의 지문을 찍고 와서는 그후부터 여자감방에는 다시 가지 않겠다며 사양했다.
그때 무더기로 수용됐던 여죄수들은 일제의 통제령을 어기고 쌀로 떡과 엿을 만들어 팔러 다니다 잡혀온 불쌍한 부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곡식생산량이 줄어든데다 1939년과 1943년에 심한 흉년이 들어 식량사정이 나빠지자 일제는 미곡강제출하명령에 이어 떡과 엿은 물론 생활필수품 통제령까지 내렸다.
이렇게되자, 쌀 한말 마음대로 사기가 힘들게 되고 부족되는 식량을 사들이기 위한 암거래가 성행했다. 어린아이를 업은 부녀자들이 암거래를 위해 쌀자루를 띠와 같이 길게 해서 쌀을 채워 서울로 운반했다.
그뿐만 아니라 쌀자루를 어린애처럼 둘러 업고 기차로 상경하기도 했다.
일본관헌들은 나중에는 이 같은 운반수단을 눈치채고 진짜 어린아이를 업고 다니는 부인네들까지 조사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 여감방은 암매 쌀장사와 떡장사를 하다 잡혀온 부녀자들로 언제나 만원을 이뤘고 지문계의 지문채취 업무도 자연히 폭주했다.
형무소에 수감되는 잡범들 가운데는 전과사실을 숨기기 위해 손바닥을「콘크리트」바닥에 문질러서 지문이 안나오게 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럴 때는 수감자를 독방에 옮겨 지문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간수가 지키고 서서 죄수의 손을 보호해야했다.
웬만큼 문지른 손은 1주일쯤만 지나면 다시 지문이 선명하게 나타나지만 피가 나도록 심하게 문질러댄 손은 2주일 이상 보호조치를 해야할 때도 있어 그때마다 간수들은 물론 지문계 직원들도 골탕을 먹었다. 총독부 법무국 행형과의 지문계는 당시 우리나라를 3개 구역으로 나누어 서울(경성)·대구·평양의 각 복심법원 관내에서 보내오는 지문 원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후 1931년6월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도 지문계가 설치돼 법무국 지문계와 별도로 경찰에 연행되는 피의자들의 지문을 채취, 수사의 자료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1946년4월l일 법무국보관 지문 원지(법무 원지) 약40만장과 경기도 경찰부보관 지문 원지(경찰원지) 약50만장 등 모두 90만장을 미군정청수사국일식과로 통합할 때까지 지문원지는 유일한 과학수사의 자료로 이용돼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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