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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7)제자 이호벽|<제38화>약사창업(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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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파란의 이응선>
여명기의 약업은 흥망 기복의 교차였다. 어느 한 품목의 「히트」로 일약「톱 메이커」의 자리에 올라서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수가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현장은 초기 의약업이 그만큼 어렸기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흥망의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역시 화평당의 이응선을 꼽을 수 있다.
이응선이 왕대인의 도움을 받아 석탄산으로 「히트」를 치고 하루아침에 거부로 발돋움, 견지동의 99간짜리 큰집에다 자본금 3만5천원의 조선매약까지 손에 넣은 것은 이미 말했거니와 그는 이때부터 사생활이나 기업에서나 통 크게 놀았다. 소실을 둔 딴 살림을 너댓군데나 벌이는가하면 99간짜리 한옥의 윗사랑엔 양의와 간호원을 초청, 조선병원을 차리고 아랫사랑에는 한의사를 두어 한의원을 냈다.
한의원은 요즘도 보기 힘드는 입원실까지 갖춘 현대식이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 의약전문지인 중외의약신보를 발행하고 모 신문창간(20년도)발기에도 한몫 거들었다.
확실히 당대의 거물로 손색없는 활약이었으며 그가 발행한 어음은 안통하는데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근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너무 벌인 것이 탈이었다.
조선보약 인수 자체가 우선 무리였다. 석탄산으로 큰돈을 잡았다하지만 현찰로 인수하기엔 이 회사는 너무 컸었다. 이응선은 구리개의 큰 건재상들에 약속수형을 끊어주고 거금을 빌어 부족분을 채우지 않을 수 없었다.
꾸운 액수는 알 수가 없으나 당시 그가 돈을 빌어 쓴 상대는 당재 「브로커」박무경, 금전 「브로커」윤창규 등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뭏튼 그는 이들의 돈을 빌어 조선매약을 인수, 약 업계의 일인자로 군림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당시의 어음할인은 1·8∼2%(1∼2개월 만기)의 만만찮은 고율이었다.
매상이 많이 오른다 하지만 이자 메우기에 쫓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실력에 넘치는 조선매약 인수는 남 좋은 일만 시킨 꼴이었다.
또 새로 개업한 조선병원도 기대했던 만큼 잘되지 않아 역시 적자였다.
그러나 가세를 기울게 한 결정적인 원인은 역시 그의 사생활이었다. 말이 너댓집 살림이지 『본 부인은 남편구경하기 힘들 정도였다』고하니 그 낭비는 새삼 말할 것도 없었다.
잔뜩 벌인 사업을 4∼5년도 버티지 못하고 이응선은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으며 나중에는 홧병마저 얻어 금화산(지금의 금화「아파트」자리)기슭 박흥식씨 별장을 빌어 휴양까지 해보았으나 끝내 회복치 못하고 42∼43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새로 산 99간 고대광실도, 종로우편국뒤 원 살림집도 빚에 넘어가 그가 운명한 자리는 공장으로 쓴 화평당 뒤의 낡은 기와집이었다.
그의 사후엔 이 화평당 집마저 남에게 넘어가 화평당은 평안감사 민영휘의 집안인 민규식씨(전 한은총재 민병희씨의 숙부)의 건물(현광교입구 금강양화점자리)에 세들어 나앉았다.
왕대인의 도움으로 입신해서 무일푼으로 죽기까지 이응선의 일생은 「공수래 공수거」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응선은 생전에 남달리 호쾌한데가 있었다.
무남독녀 외딸(본부인 소생)을 화평당의 점원이었던 조종국에게 시집보낸 것이 그 한 예.
서울태생인 조종국은 그의 형 종원과 함께 어릴 때부터 화평당에 들어가 약도 달이고 약도 팔고 회계심부름도 한 사환이었다.
그는 어릴때 아버지를 여의고 천주산신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이응선이 「가톨릭」계통 인사에게 부탁, 데려와 썼다는 말도 있으나 그 경위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조종국은 형과 함께 궂은 일을 도맡아하며 화평당에 충성을 바쳤다.
조종국의 친구였던 박기승씨(77·전 대한한약협회정)에게 듣기로는 그는 천성부터가 충직했다.
술·담배를 안하고 「오버」단추가 떨어져도 그대로 내버려두는 등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자기 맡은 일만 꾸벅꾸벅했다.
특히 그는 독실한 「가톨릭」신자여서 당시에 이미 명동성당 청년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었다.
당시 이응선집엔 좋은 혼처가 많이 들어왔고 그중엔 공장장이던 김두진(서울태생)도 후보에 올랐는데도 이들을 모두 마다하고 자기위치보다 너무나 동떨어지는 상황이기는 하나 솔직하기 이를데 없는 조종국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를 결국 선택했다. 그 당시로서는 커다란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서자가 많았지만 모두 어리고 가업은 자연 사위에게 맡기지 않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사후 집안살림을 맡기는데는 신분보다도 충직한 성품이 제일이라고 본 모양이었다. 이응선의 이 「파격」은 역시 적중한 것이었다.
조종국은 그 뒤 화평당과 조선매약을 이응선의 막내동생 동선과 함께 이끌며 한평생을 처가 뒷바라지에 바쳤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신망을 얻어 장면·박병래(전 성가병원장)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나중에는 유홍렬박사(전 성균관대대학원장)의 대부로 서기도 했다. <계속> 【이호벽】

<고침>
동화약방창업 민병호의 고향 충북충주(1회 하단)를 충북청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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