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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북괴의 통일 전선에 영합|중앙정보부, 수사 상황 발표-일본인 2명 등 60명 관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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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25일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 연맹의 중간 수사 내용을 발표했다. 신 정보부장은 정부 전복과 국가 변란 획책 사건에 관련, 조사를 받고 있는 수사 대상자가 지금까지 2백40여명이며 각종 유인물 10여만장, 기타 관련 증거 자료 및 이들의 진술에 따라 일본 공산 당원 「하야가와·요시하루」씨 (37·경기대 일본어 강사)도 포함 60명의 관련된 사실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신 정보부장 회견 내용·관련자 인적 사항은 7면에>
발표에서 정보부는 「민청학련」의 정부 전복 및 국가 변란 기도 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순 단체인 인민 혁명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당원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배후에서 작용했다고 말했다. 또 이번 사건 주동자들은 폭력 봉기를 선동함에 있어 4단계 전략을 짰다고 별항과 같이 발표했다.

<「민청학련」 수사 상황 중간 발표 전문>
정부는 지난해 10월2일의 학원 사태 이후 북괴의 대남 선동이 날로 격화됨과 더불어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일부 학생의 동향이 북괴의 대남 적화를 위한 통일 전선 형성 공작과 일치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이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가지고 그 동태를 주시해 왔다. 지난 1월 방학으로 표면상 학원이 평정을 되찾은 듯 했으나 실상은 일부 불순 학생의 움직임이 날로 지하화·음성화하면서 종전에 볼 수 없었던 「혁명」 운운의 용어가 불순 학생 세력간에 사용되고 항간에는 이른바 「3·4월 위기설」이 파다하게 나돌아 민심의 불안을 부채질하는 등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단속되어 오고 있었다. 동급 학교가 개학을 하게 되자 이러한 불순 세력의 활동 양상은 더욱 활발해져 금년 3월 중순에는 폭력으로 공부를 타도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논의하는 등 공산 계열의 책 등에 의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부임한 행동이 일부 표면화되고 이들 불순 세력이 74년4월3일을 기해 서울·대구·부산·광주를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대학가 및 고등 학교의 학생과 시민을 선동, 동시다발의 일대 폭력 「데모」를 감행함으로써 정부 기능을 마비시켜 정부를 전복하고 국가를 변란 할 것을 치밀하게 사전 계획하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이와 같은 사태에 처하여 선량한 다수 학생과 국민이 부지불식간에 공산 집단과 결탁한 불순 세력의 책략에 이용되어 대한민국의 안위에 영향을 미치는 위험 천만한 행동으로 나서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지난 4월3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하고 전면적 수사에 나서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 2백40여명이 이른바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 연맹」이라는 반국가 단체가 중심이 된 이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조사 받고 있는 중이며 불순 학생들이 준비하고 있던 각종 유인물 10여만장 기타 관련 증거 자료와 관련자들의 진술에 의하여 이 사건의 윤곽이 대체로 파악되었으므로 지금까지의 조사 상황을 정리하여 발표한다. 아직도 수사가 진행 중이므로 사건 전모를 밝히지 못하는 사정을 양해하여 주기 바란다.

<배후 관계>
이른바 「전 국민 주 청년 학생 총 연맹」의 정부 전복 및 국가 변란 기도 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순 단체인 인민 혁명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 당원과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바 이들 배후 인물의 성분과 작용 사실을 설명하면 그 첫째로 전 인민 혁명당 당수 도예 종은 64년7월께 북괴 간첩 김배영·김규철 등 공산 분자들로 구성된 소위 인민 혁명 당을 조직하여 지하 활동타가 피검, 복무한 자,
서도원은 용공 불순 단체인 전 민주 민족 청년 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타가 작년 12월에 피검 되어 복형한 자,
하재완은 용공 불순 단체인 민족 자주 통일 경북 협의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타가 5·16후 도피 64년 사면된 자들로서, 이들은 평소 염원하여 오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려면 분산된 자파 세력을 규합하고 학생 폭동을 일으켜 현정부를 전복하는 길뿐이라고 망상한 나머지 상호 연계하여 각파 세력을 연합하기로 합의하고 71년4월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한 당시 경북대 법정대 정외과 4년에 재학 중인 여정남을 포섭, 조종하여 71년부터 73년11월5일간에▲경북대 교련 반대 「데모」와 불온 유인물 「반독재 구국 선언문」 살포 사건을 위시하여 ▲경북대·반독재 민주 구국 투쟁 위원회 학생 「데모」등 전후 수회에 걸쳐 대 정부 투쟁을 전개토록 배후 조종하였으나 그때마다 당국의 제지로 좌절되자 73년12월초 위 여정남에게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전국적 규모의 학생 동원과 학생 「데모」를 일으켜 민중 봉기에 점화하는 역할이 이루어져야 하나 서울을 거점으로 하여 전국적인 학생 조직을 결성하도록 하고 자신들은 민중 참여를 목적으로 한 혁신계 세력을 확장키로 모의 결정한 다음 73년12월 초순께 도예종과 서도원은 각각 상경하여 시내 청진동 소재 「삼영 일어 어학원」 강사로 있는 전 민자통 경희대 위원장 이수병과 전 인민 혁명당 당원 김용원 등에게 위 여정남을 인계하여 서울 각 대학의 조직 지도와 자금 지원 책임을 맡겼고 동 이수병 김용원은 이철 유인태 안량노 등을 여정남에게 소개함으로써 74년3월21일 경북대학교 반독재 민주 구국 투쟁 학생 「데모」를 지도함을 위시하여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 연맹의 구성과 활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거사 자금을 지원하는 등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둘째로 1966년 일본 좌익계의 교내 자치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일본의 「주간 현대」등 주간지의 자유 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던 「다찌가와·마사끼」 (태도천정수) (남·28세) 는 재일 조선인 총 연맹의 비밀 조직원으로서 재일 민 단원을 자칭하고 있는 곽동의의 조종 아래 관광 명목으로 우리 나라를 수차에 걸쳐 드나들면서 1968년 이내 일본 공산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 「적기」 등에 논문을 기고하여 오던 「하야 가와·요시하루」 (조천가춘) (남·37세)와 더불어 이 사건의 주동자인 이철 유인태 등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위 이철 등에게 폭력 혁명 계획을 격려 선동, 금품을 제공하여 이를 방조하는 등의 활동을 한 것이 드러나고 있다.
세째로 조영래 장기표 등은 국가 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사건으로 복역한 사실이 있는 등, 이현배는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 자, 유근일은 좌파 혁신계로 활동하다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7년간 복역한 사실이 있는 자, 황인범은 평소 용공 사상을 포지한 자들로서 동인 등은 상호 공모하여 서울대학 후배 재학생인 이철 나병식 유인태 김병곤 등 소위 민청학련 주모급 학생들에게 전국 대학생 연합 조직 방법과 투쟁 방법 및 목표를 교사하고 거사 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폭력 「데모」때 사용할 유인물의 원고를 제공하는 등 민청학련의 활동을 배후 조종, 지원하였다.
내째로 한국 기독 학생 연맹의 간사인 이직형 정상복 안재웅 서경석 이광일 등 일부 간부 등은 한국 기독 학생 총 연맹의 간부이자 민청학련 주모자인 이철 나병식 황인성 등이 추진하고 있는 정부 전복 기도를 지원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위해 동 대학의 기독 학생회와 일부 교회 대학 생부를 연합하여 교회 청년 연합회를 조직하여 세력을 규합하기로 하였고, 73년12월 광주에서 개최되었던 한국 기독 학생 총 연맹 동계 수련 대회 겸 총회를 빙자해서 유신 헌법 반대를 구실로 대 정부 투쟁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정하는 일방 동 연맹 간사인 이직형 정상복 안재웅 및 동 간사부인 나상기 서경석 이광일 등은 74년3월께부터 나병식 황인성 등과 모의를 거듭하고 4월부터 민청학련이 주동하는 반정부「 데모」가 실패에 돌아가면 2단계로 교회 청년 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정부 전 복「데모」를 감행, 결정적으로 정부를 타도할 것으로 합의하고, 전국적으로 각 대학 및 교회 청년 대학생부의 조직을 정비, 강화하기로 결정,4·3민청학련 주동「데모」의 자금 지원을 위하여 동 연맹의 사업비를 「데모」조직 활동비·전단 제작 대금으로 지출하는 등 민청학련의「데모」를 적극 지윈 하였음이 밝혀졌다.

<주동자의 사상 배경>
이른바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 연맹」의 활동 총책인 이철을 비롯한 정문화 유인태 김병곤 황인성 이근성 나병식 정윤광 서중석 안량노 등 주동자들은 정치 사회 사상 연구를 빙자하여 각종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위에서 설명한 배후 인물들로부터 수시 공산주의에 대한 교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북괴 대남 방송을 꾸준히 청취함으로써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에 물들어 그들이 염원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려는 우리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른바 노동 정권을 수립하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본격적인 폭력 혁명에 의한 우리 정부 타도를 기도하였다.

<투쟁의 목표와 전략>
이 사건 주동자들은 폭력 혁명에 의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 계열의 노선에 따르는 소위 노동 정권의 수립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들은 폭력 봉기를 선동함에 있어서 공산주의 또는 기회주의적인 색채를 처음부터 강하게 나타나게 한다면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다수의 학생과 시민이 호응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본래의 태도를 은폐하고 학원 내 각종 학생 「서클」을 통해 우선 유신 체제와 정부의 시책을 비민주적 독재로 단정하는 일방, 자원 파동에 따른 세계적 경제 파동으로 인한 국내 경제의 어려움을 전적으로 정부의 실책에만 있는양 과장함으로써 「민주 회복」 「민생고 해결」 「매판 배격」 등의 명분을 내세워 모든 반정부 세력을 규합하는 것으로 제1단계 전략으로 삼고 다음으로 긴밀한 사전 계획과 조직에 의하여 전국 각급 학교 학생과 시민을 선동, 4월3일을 기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시위를 전개한 후 이를 저지하는 경찰 등에게 미리 준비한 화염병을 투척하고 각목 등으로 대항하여 유혈 사태를 유발함으로써 시위 군중을 폭도 화하여 파출소, 경찰서를 위시한 중앙청 청와대 등 광화문 일대의 중요한 정부 기관을 점거 방화하여 정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인수하여, 제3단계에서는 반제·반식민지·반 매판을 표방하여 노동 계급과 통일 전선이 민주 연합 정부를 수립하려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를 수립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들은 정부 전복 후 공산 계열의 노동 정권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도적 정치 기구로서 학생과 사회 일부 불순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지도부」의 결성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

<모의 및 활동 상황>
가, 주동자들의 회합·모의 1973년의 10·2학원 사태를 서울대 문리대에서 주도하였던 이철은 방학으로 인하여 후속 「데모」가 단절됨으로써 기대하였던 대로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그 실패의 원인을 전국적인 학생 조직이 없었던 것과 공산당의 혁명의 기초 동력인 노동자·농민의 호응을 얻지 못한데 있다고 판단, 동년 l2월 초순경부터 새로운 학생 조직 결성을 위하여 인성 김병곤 나병식 서중석 강구철 등과 개별 접촉을 통하여 동조 세력을 규합하면서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조직을 지방으로 확대하고 전국화할 것을 기도하는 한편 학생 운동의 기본 방향 등을 논의하여 오다가 1974년3월께 이르러 폭력 혁명의 계획이 구체화되어 거사가 임박하자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 연맹」을 구성하게 되었던 것으로서 위기간 중 이 사건 주모자들이 전후 2백여회에 걸쳐 회합, 모의한 내용 중 주요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1973년12월 초순경 서울 문리대 앞 「카톨릭」 학생 회관 휴게실 「유니따스」에서 이철, 황인성, 제정구 등이 모여 혁명의 기본 방향을 논의한 끝에
▲10·2학원 사태는 산발적·비조직적이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금후 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보다 더 조직화하고 규모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기로 한다.
▲금후 「데모」는 폭력적 방법에 의할 수밖에 없다는 등 폭력에 의한 정부 전해을 모의하였고
(2)73년12월 중순부터 74년1월 중순경까지 간에 서울 문리대 앞 소재 학원 살롱 및 아담 다방, 사직 공원 앞 대머리 주점, 새문안 교회 앞, 주점, 서울 문리대 앞, 부산 집 주점 광주, 명미상 다방, 부산 귀포 역전 소재 거호 미상 중국 집, 속리산 관광 호텔 앞 부산 여관, 대전 사랑방 다과점 등을 전전하면서 전후 20여회에 걸쳐 이철 유인태 정문화 김병곤 황인성 김효순 이근성 김홍표 박종현 강구철 임규영 윤한봉 이강철 곽성문 권진관 이종구 문국주 김재남 오성숙 박혜숙 이상문 송무호 나병식 강영원 도종수 서중석 유인태 정윤광 김수길 등이 회합하여 이철 유인태 등으로부터 정부 타도 방법을 논의함에 있어 10·2 「데모」가 실패한 원인은 전국 각 대학이 연합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각 대학이 자기들 나름대로 체계 없는 「데모」를 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정을 깨닫고 신학기에 들어서면 전국 각 대학이 고등학교와 합세하여 적당한 시기에 일제히 봉기하여 이번에는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제의한바 참석한 전원도 이 안에 동의하는 등 정부 전복을 위한 모의를 하였고
(3)74년1월말 서울 광화문 소재 「크라운」 제과점에서 이철 정문화가 회합하여 위와 같은 내용을 모의하였고
(4)74년2월6일 서울 도봉구 소재 유인태가 얻어 둔 셋방에서 지도부 8인이 모여 조직 부서를 인정하는 동시 정부 역량과 학생의 호응 도를 시험키 위한 산발적 「데모」를 유발키로 결정하였고
(5)74년2월10일 대구시 대봉동 풍곡당 빵집에서 서울대학교의 지방 연락책 유인태 전홍표 등과 경북 대책 임규영 정화영이 합동하여 (소위 대구 회합) 경북대가 3월21일 폭력 「데모」하기로 기본 방침을 결정하였고
(6)74년2월24일 이래 5회에 걸쳐 대전시 소재 사랑방 다과점에서 지도부 요원 황인성 및 영남 지방 책 임규영, 호남 지방책 윤한봉 등이 회동하여 (소위 대전 회합) 「데모」를 지방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하였고
(7)74년3월1일 광주시, 소재 학생 회관 앞 영화 식당 등에서 전남 대책 윤한봉 등과 지도부 요원 이철, 황인성, 나병식 등이 회합하여 (소위 광주 회합) 전남대에서도 폭력 봉기하기로 원칙을 결정하였고
(8)74년3월17∼3월29일 부산에서 황인성, 윤한봉 등이 회합 (소위 부산 회합)하여 4·3 폭동 결항을 합의하였고
(9)74년3월21일 지도부는 서강대의 「데모」를 3월중 감행하고 지방 대학에서 시발된 폭력 「데모」 분위기를 서울에 비화시키기로 방침을 결정하였고
(10)74년3월 하순경 경기도 양주군 사능에서 지도부 요원과 각 대학책이 모여 폭력 혁명을 위하여 그들의 결투를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 연맹」이라 호칭하기로 결정하고 거사 일을 4월3일로 하여 각 대학이 일제히 봉기함과 동시에 오후 2시에 서울 시청 앞 광장 및 청계천 5가 네거리에서 일제히 전단을 살포하는 등 시민을 선동하여 가세시키기로 하며 우선 전초전으로 연대가 4월1일에 폭동을 주도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1) 이들 주동자 등은 자신이 검거되더라도 계속적인 투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안량로·유홍준 등과 이광일 서경석 등으로 하여금 예비 조직을 하도록 모의하였다.
나, 전단 등 불온 유인물의 제작 살포 폭력 봉기의 거사일이 가까워지게 되면서 주모자들은 「데모」 때에 학생과 시민을 선동하기 위한 전단 선언문 등 유인물을 다시 제작하여 이것을 전국적으로 살포, 전파코자 하였는바 그 제작 경위·내용 및 배포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민청학련의 지도부 요원인 이철·정문화·황인성·김병곤·이근성 등 주모자들은 서울·부산·대구·광주·춘천 등지의 조직이 거의 완료될 무렵인 1974년3월 중순경부터 4월 초순경까지의 사이에 서울시 도봉구 삼양동 소재 김병곤의 자취방, 광화문 소재 「우드스톡·레코드」상 옆방 및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독립 가옥을 빌어 설치한 비밀 인쇄소 등지에서 장기표 등으로부터 인수하였거나 동 주모자들이 만들어 놓은 원고에 따라 공산 폭력 혁명을 선동하고 북괴의 주장 그대로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불온 유인물 「민중·민족·민주 선언」 「민중의 소리」 「지식인·언론인·종교인들에게 드리는 글」 등 10여만장을 노사 제작하여 조직원들로 하여금 기국 각지에 살포하였고,
(2)「민중·민족·민주 선언」 「지식인·언론인·종교인에게 드리는 글」「민중의 소리 등 제목을 가진 이들 유인물은 ①제목 자체에 공산주의자의 위장 구호를 사용하였고 ②북괴의 상투적 대남 비방 구호인 『매판 족벌』『창부 경제』 『봉건적 착취』 『농민 수탈』 등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반체제 반정부 운동을 선동할 뿐 아니라 ③『반공법과 보안법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다』느니, 「남북 대화한다면서 정치 선전을 일삼았다』느니 하는 등 북괴 공산주의자들의 호위 선전·주장을 그대로 반복하여 정부를 비방하고 ④ 『날아가는 까마귀야』 운운의 북괴에서 부르고 있는 혁명 찬양의 노래 가사를 그대로 인용하여 공산 혁명을 찬양 선동하고 ⑤『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노동자 농민이 궐기하라는 등 폭동을 선동하였으며,
(3)위 유인물을 각 지방책과 학교책에게 분배하여 그 내용을 근간으로 각 학교 별로 「선언문」등 유인물을 작성하되, 그 제목 단체 명칭은 다양하게 붙여 제작 살포토록 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울 및 지방의 각 대학에서 폭력 「데모」를 선동하는 유인물이 수만장 작성되기에 이르렀고
(4)위와 같이 마련된 유인물을 선교 활동을 위장하여 판자촌·시장 등 영세민에게 집중적으로 살포하고 도심지에서는 고층 건물에서 투하 살포하며 각 학교에는 학생 부재 시 교실 등에 비밀히 배포하고 행인에게 선물·종교 서적 등으로 가장하여 배포하였던 것이다.
다, 접선 연락
이 사건 주동자들이 모의 및 기타 활동을 위하여 접선·연락을 함에 있어서는 마치 특수 훈련을 받은 간첩들이 사용하는 수법을 썼는 바 그 내용을 보면
(1)각종 회합 연락은 점 조직의 형태에 따라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고 접선시에는 시간·장소·교명·관계자 명에 관한 암호 사용 등 비밀 지하 활동을 전문하였고,
(2)주동자 급은 2∼3개의 가명을 사용하되 특히 고교생을 접선, 지령할 때는 반듯이 가명에 의하였으며 특히 이철 등 몇몇 주모자들은 타인의 주민 등록증을 가지고 신분을 위장하였다.
라, 화염병 등의 준비
주모자들은 「데모」를 유혈화하여 폭동으로까지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도구로서 화염병, 화학탄, 각목 등을 준비하였는바 그 내용을 보면
(1)「링게르」병·「사이다」병 등에 「올레인」산·염소산가리·유황·「마그네슘」등 화공 약품과 휘발유 등을 재료로 하여 화염병을 만들고
(2)각목을 준비하여 교내 여러 곳에 은닉하고
(3)자동차를 사용하여 저지선을 돌파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던 것이다.
마, 활동 사항
(1)이들은 이상과 같은 모의 과정을 통해 주도 면밀한 사전 계획에 따라
74년1월21일 서울대 의과 대학에서
74년3월21일 경북 대학에서
74년3월28일 서강 대학에서
74년4월1일 연세 대학에서 각각 반정부 학생 시위를 감행하려다가 경찰의 저지로 중지되었고
(2)74년4월3일 상오 11시를 기해 서울대학교를 위시하여 서울 시내 중요 대학이 고등학교 학생들과 합세하여 일제히 봉기하고 동일 14시에는 서울대학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동부 지역 수재 대학은 청계천 5가 네거리에 집결하고
연세인과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한 서울 서부와 북부 지역에 산재한 대학은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집결하여 일반 시민의 호응 합세를 받아 광화문 일대에 있는 중앙청·청와대를 비롯한 중요 정부 청사를 점거하여 정부를 전해하고 국가를 변란 하려다가 경찰의 사전 저지로 좌절되었다.
국민 여러분!
이상이 현재까지의 수사에서 나타난 「전 국민 주 청년 학생 총 연맹」 사건의 개요이다.
수사의 과정을 통하여 정부는 많은 선량한 학생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순 공산 세력의 책동에 이용당해 온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부는 옥석을 가려 일시적 과오로 반국가적 불법 단체의 성격을 알지 못한 채 부화 뇌동한 자는 엄중히 훈계하고 장래를 위하여 관용할 것이나 공산 계열의 노선에 따라 학원가에 침투하여 암약해 온 불순 세력에 대해서는 차제에 단호히 그 뿌리를 뽑을 것이다.
국민 여러분도 이 사건이 가지는 반국가적 성격을 충분히 양찰하고 앞으로도 계속 이 사건 수사에 협조하여 주기 바란다.
끝으로 이와 같은 불순분자가 다시는 우리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국민과 학생 여러분 모두가 경각심을 드높여 주도록 거듭 당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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