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a 포커스] 시아인의 모래알 같은 특성, 계기 되면 유리처럼 뭉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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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러시아인, 러시아의 길』이란 책이 발간됐다. 책에는 17명의 고위 러시아인들이 쏟아내는 러시아 자체, 러시아 과거와 미래, 한·러관계 등에 대한 깊은 조언들이 들어있다. 한국인은 잘 모르는 러시아에 대한 자기 평가도 있다. 보통 이런 충고는 귀담아듣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들어보면 쓸모가 많고 러시아를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도 준다. 이에 본지는 책에 실려 있는 인터뷰 형태의 조언을 발췌해 소개한다.

뱌체슬라프 니코노프 루스키 미르 재단 이사장

-이사장님께 러시아란 무엇인가요?

“러시아는 지구에서 가장 추운 지역에 가장 영토가 큰 국가를 세우고 발전해온 문명입니다. 동서양 교차로에서 사방으로 압력을 받으며 어려운 지리적-기후적-정치적-군사적 여건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대표적 단일민족 국가 중 하나인 한국과 달리 러시아는 처음부터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러시아는 엄청난 참을성, 강인함, 단결력을 통해 자국을 보호하고 생존을 위해 부족한 자원을 모아 집중시켜 생존했습니다.

러시아 문명은 슬라브 문화가 바탕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노르만족을 통해 유럽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러시아 문화의 기저에는 비잔틴 제국이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에서 러시아로 기독교와 건축, 미술, 문자가 유입됐습니다. 비잔틴 문화는 당시 유럽 문화보다 발전해 있어서 러시아 문명의 기반도 높은 수준입니다. 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이 250년 이상 러시아를 통치하며 동양의 발자국을 남겨 놓았습니다. 당시 칭기즈칸이 세운 제국은 몽골뿐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 지역에까지 뻗쳤고 인구조사부터 소득세, 역참제 등 제국의 여러 제도가 러시아에 유입됐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러시아 문명은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서구 문명에 편입되지 않은 탓에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통치자들은 로마에서 왕위를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톨릭교도가 되지 않았어요.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은 우리가 16세기 초 몽골-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나면서 생겨났습니다. 당시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인 바실리 3세는 분리된 러시아 교회를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 아래 편입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러시아는 거부했습니다. 서구에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러시아는 그 몇 년 사이에 지금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그게 지금까지 죽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현대 러시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평범한 보통 사람이지요. 러시아인과 한국인을 가장 잘 이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층이 많다는 것입니다. 현대 러시아인은 질문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호기심이 많고, 말로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일차적으로는 역사적 이유 때문에 러시아인은 체계적인 활동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날이 추워 경작기간이 길지 않고, 짧은 기간에 많은 일을 해야 하지요. 그 때문에 러시아는 짧은 기간에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지만 체계적으로 매일같이 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지요.

또 러시아인은 항상 큰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뭔가를 그냥 하지 못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큰 아이디어로 영감을 받을 때는 큰 산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없을 때는 혼란에 빠져서 길을 못 찾기도 하지요.

현대 러시아인은 개인주의자입니다. 두 명의 러시아인에겐 세 개의 의견이 있다고 합니다. 또 역설적인 민족입니다. 큰 문제의 해결엔 단결하지만, 일상 문제에선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지요. 다양한 그룹으로 나뉘어 대화조차 나누지 않기도 합니다.

제 지인인 일본의 정치학자 시게키 하카마다 교수는 이렇게 말했어요. 서구 문명은 돌 혹은 벽돌의 문명이고, 동방의 문명은 진흙의 문명이다. 진흙은 부드러워서 모양을 만들어 구울 수 있다. 그런데 러시아 문명은 모래의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압력이나 온도가 높으면 모래로 유리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보통 모래는 흩어져 있습니다. ”

본 기사는 <로시스카야 가제타(Rossiyskaya Gazeta), 러시아>와 중앙일보가 협력해 제작?발간합니다. 또한 Russia포커스 웹사이트(http://russiafocus.c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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