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자유의 대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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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근 산학협동이라는 말이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생산기업체 측과 학문, 즉 대학 측이 협동을 해서 국가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취지이기 때문에 대체로 환영을 받고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당위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모 경제단체에서는 이미 상당한 금액까지 제공하는 용단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문제가 있다. 학문은 어떠한 경우에도 순수해야 되고(즉 금력이나 권력에서 초연) 대학은 역시 고고한 자세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근대산업과 국가발전을 위하여 대학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가를 우리는 잘 알고있다. 그러나 순수한 학문연구의 결과로 얻어진 「지식」은 국가뿐 아니라 인류전체를 위한 만인공유의 재산이 되는 것이며 결코 어느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산업 측에서 언제나 일방적으로 대학의 지식을 얻어간 것이었지 대학이 의식적으로 지식을 팔아먹거나 주문에 의해서 지식을 생산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2천년전의 「피타고라스」나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연구가 최근의 달나라 여행을 위한 정밀한 계산의 토대가 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교육계획이니 인력수급이니 하면서 대학의정원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고 규격화하는 일이 과연 얼마만한 의의가 있는 것인지 한번 다시 생각해 봄직도 하다. 「목적자유」의 대학이란, 어떤 하나의 목적, 이를테면 법관이나 기술자 또는 약제사 등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이 아니고 무한한 가능성이 내포뇐 전 우주적인 학문연구를 목표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유니버시티」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이다. 법학은 「법」 그 자체의 심오한 원리를 연구하는 것이고, 약학도 단순한 약제사의 자격을 목표로는 하지 않는다.
물론 직업학교나 직업교육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어떠한 약품을 개발하고 만들어내기 위해는 수준이 높은 특정한 제약 연구기관이 얼마든지 설립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업학교나 특정한 연구기관들이 대학 자체를 삼켜버려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역시 어느 한구석에는 시대의 흐름에서 뒤떨어진 것 같은, 상아탑 속에 고립된, 현실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학문자체를 위한 학문을 미련하게 밀고 나가는, 그러한 세력도 남아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훔볼트」에 의해서 이와 같은 이념(목적자유)의 대학이 처음으로「베를리」에 창설된지도 벌써 1세기가 훨씬 지났다.
오늘날 시대는 변천하여 대학의 현실과 사명이 여러모로 복잡해지고 운영면에서도 애로가 많다는 것을 모르는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기본자세만은 혼들리지 말아야 하겠고, 목전의 이익이나 고층건물 등 외형적인 학교발전에 눈이 어두워서 정신적인 밑바탕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것이 규격화해가고 대량생산의 체계가 잡혀가는 세상이지만 인간교육만큼은 기계의 부분품 모양 생산되거나 수급된다고 생각해선 안될 것이고, 모든 운영이 돈을 목적으로 경제성을 위주로 하는 기업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대학만은 그 경제성을 초월하는 고차원적인 위치에서 가치를 발견하였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희망인 것이다.
우리 처지에서도 대학의 육성이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었으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순수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경제단체나 기업인 측에 여유가 있다면 말없이 기부나 보조 등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뭣보다도 대학 측에서 거기 영합하거나 구걸하는 것 같은 인상이 있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박찬기<고대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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