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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빛을 그린 손상기, 여수 밤바다로 돌아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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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손상기(1949~88) 여수 태생의 손상기는 1979년 상경해 아현동 굴레방다리 인근에 화실을 차리고 강습으로 생계를 꾸렸다. 사진은 그때 모습.

쪽빛 바다도, 검은 모래 해변서 뜨는 해도, 그가 자랐던 갈색 나무대문 집도, 그대로다. 그러나 화가는 이미 26년 전 세상을 떴고, 그림만 전설로 남았다. 살아 있었다면 65세. 영원히 30대에 머물러 있는 그를 잊지 못해 늙어가는 지인들이 고향 여수에서 전시를 꾸렸다. 생전에도 없었던 첫 귀향전이다.

 전남 여수 GS칼텍스 예울마루에서 ‘고통과 절망을 끌어안은 영혼-손상기 25주기’전(지난해 12월 27일부터)이 열리고 있다. 유화·드로잉 등 모두 127점이 걸렸고, 아내 김분옥 씨가 작업실을 재현했다. 화가가 단 한 번도 화폭에 담아본 적 없는 짙푸른 바다 물결이,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이 전시장 바로 앞에서 속절없이 출렁인다.

 손상기(1949~88)는 세 살 무렵 척추만곡증을 앓았다. 서른아홉에 타계하기까지 ‘한국의 로트레크’라 불리며 힘겨운 생활을 쓰고 그렸다. 사고로 자라지 못해 단신이었던 툴루즈-로트레크(1864∼1901)는 19세기 말 카바레·뮤직홀·사창가 등 파리 밤문화의 초상을 근거리에서 포착한 화가다.

‘시들지 않는 꽃’ 연작은 자라지 못한 그의 자화상인 동시에 통증마비의 도시, 서울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아래 그림은 ‘시들지 않는 꽃-해바라기’(1981). [사진 여수 예울마루]

 손상기를 일찌감치 알아본 것은 선배 화가들. 손씨의 작품을 관리하는 샘터화랑 엄중구 대표는 “김기창·권옥연·전혁림 등 원로 작가들이 앞다퉈 작품을 사갔다”고 말했다.

통영의 짙푸른 바다를 그림에 담았던 전혁림(1916∼2010)은 “시커먼 그림이 빛을 발하고 있소! 세계적으로 드문 그림이오”라며 흥분했고,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관전 대표작가였던 화가 윤형근(1928∼2007)은 “음악은 슬퍼야 되고 미술은 소박해야 되는데 박수근 이후 가장 소박한 작가가 손상기”라고 평했다. 글과 그림에 두루 능했고, 신표현주의라는 당대 국제 미술계 흐름과 맥을 같이 하며, 리얼리티 충만한 작품을 내놓았던 손상기는 비극적 삶의 조건이라는 개인사까지 갖추고 있어 사후에도 여러 차례 재조명됐다. 2008년 국립현대미술관 20주기전, 2001년 예술의전당 13주기전이 대표적이다.

 화가가 남긴 그림은 또한 우리가 지나온 삶의 궤적이다. 몸집보다 큰 봇짐을 머리에 인 어머니와 그 옷자락을 잡아끄는 판자촌 아이가 애처로운 ‘나의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이 어두운 그림에 화가는 이렇게 적었다. “무겁고 무겁다/인생 삶/짐이 무겁고 아이가 무겁고 마음이 무겁고/무거운 것/ 고달픈 것/그들을 도우소서.”

 손상기는 79년 상경해 아현동 굴레방 다리 옆에 사글셋방을 얻고 화실을 운영하며 지냈다. 곳곳이 개발중인 ‘공작도시’ 서울을 화폭에 담으며 “장애물이 많은 도시/나에게 서울은 벅차다/육교, 지하도, 넓은 건널목 그리고 소음/한겨울에 에이는 추위/밀리는 사람들의 표정 없는 얼굴들 모두가……”라고 썼다. 밑동이 잘린 ‘자라지 않는 나무’, 허리가 꺾인 채 화병에서 말라가는 ‘시들지 않는 꽃’ 등의 자전적 그림들 또한 수 십년 지난 지금까지 관객을 울리는 ‘절창’으로 꼽힌다.

 이렇다할 전시 공간이 없던 여수에 엑스포를 계기로 대형 전시공간이 들어서면서 손상기에 대한 재조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전시를 계기로 여수시는 손상기기념사업회, 샘터화랑 등과 함께 손상기 기념관 설립을 논의 중이다. 전시는 26일까지. 061-808-7036. 

여수=권근영 기자

◆손상기=전남 여수 출생. 세 살 무렵 척추만곡증으로 장애인이 됐다. 여수 제일중학교와 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원광대 회화과를 나왔다. 대학 시절인 1977년 전북미술전람회 특선을 차지했고, 상경 후 81년 한국현대미술대상전 동상, 중앙미술대전에 입선했다. 85년 폐울혈성 심부전증 진단을 받은 뒤 입·퇴원을 반복하다 88년 부인과 두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3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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