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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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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4년간 유럽 파견 근무를 하며 한국에서 큰 이슈가 생길 때마다 잡지 기고나 라디오 인터뷰 요청을 받곤 했습니다. 선진 사회인 유럽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소개해 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인성 교육, 문화재 복원, 국방 개혁, 다문화 가정 지원, 철도 민영화 등 주제도 다양했습니다. 아는 대로, 때로는 공부해서 답을 했지만 어찌 보면 참으로 뻔한 내용이었습니다.

 청소년 인성 교육과 관련해서는 부모들이 선생님을 존중하니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교사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많은 학생이 ‘스펙’ 용도가 아닌 진짜 봉사활동을 하는데, 사실 자원봉사는 어른들이 더 많이 한다는 점을 수치를 들먹이며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원고를 받은 잡지사에서는 기대했던 특별한 처방이 없어서인지 시큰둥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훼손된 문화재 복구에 대해서는 당장 제대로 복원할 능력이 없으면 장기 과제로 삼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역시 그다지 인상적인 답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최근 한국을 뜨겁게 달군 철도 민영화 문제에도 화끈한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4년 중 앞의 2년은 국영 철도의 표본인 프랑스에 거주했고, 최근 2년간은 민영 철도의 대표국인 영국에서 살았지만 어느 쪽이 옳은지, 좋은지를 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양쪽에 확연히 드러나는 장·단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답은 진지한 논의를 거쳐 국민들이 수긍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원칙론에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시민혁명 등 수많은 변혁과 그 뒤의 좌절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어서인지 유럽인들은 좀처럼 단박의 변화를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연금 개혁은 15년 정도의 장기 계획으로 단계별로 추진하고(스웨덴), 신규 고속철 건설 기간을 20년으로 잡기도 합니다(영국). 4년 동안 초고속으로 4대 강을 정비하고, 불에 타 사라진 숭례문을 5년 단기 속성으로 다시 세운 우리와는 많이 다릅니다.

 1980년대 후반에 유행했던 ‘세계의 10년은 우리의 1년’이라는 구호를 기억하시는지요. 고도 성장의 자부심은 그렇게 한껏 표현됐습니다. 10대 1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제로 엄청난 속도로 발전이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지난 4년 만을 놓고 보면 한국과 서유럽 부국의 간격은 별로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의 격차도 비슷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발표하는 국민행복지수 순위도 바닥권 그대로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유럽 배우기가 유행인 듯합니다. 정치는 독일, 복지는 북구, 창조산업은 영국으로 성공 모델이 자주 거론됩니다. 하지만 실상 새로운 것은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미 다 아는 것들입니다. 다만, 잘 숙성된 목표를 향해 차분하게 다가가는 그들의 자세가 다를 뿐입니다. 전력질주하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우리들이 정작 유럽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런 마라톤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이상언 런던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