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49)<제34화>조선변호사회(24)|정구영<제자 정구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총독부 우민정책>
백백교 사건이 경성지법 검사국에 계류 중이던 당시는 조선총독부가 3·1운동직후 육군대장이던「하세가와」 총독을 경질하고 해군대장이요, 해군대신을 역임한 「사이또」를 새 총독으로 맞아 소위 문화정치를 한답시고 그때까지의 무단정책을 대폭 수정하던 때로서 그 중임은 경무국장인 「마루야마」가 담당하고 있었다.
우광현의 사건이 계류 중이던 1924년 가을쯤 경무국장 환산학길는 소위 그 문화정책을 다룬다고 하여서 전북 정읍의 「훔치교」도 보천교라 하여 공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천자는 공공연히 교주노릇을 하며 경성을 왕래하고 있었고 정읍에는 차천자 본부를 막대한 돈으로, 궁궐 같이 건축하는 것을 공인했었다.
여담이지만 정읍의 그 건물은 뒷날 헐려서 태고사, 즉 현재의 조계사 건물로 이축 되었는데 현 조계사의 건물구조 등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정읍의 소의 차천자 궁이 얼마나 거대했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총독부당국의 이 같은 사교에 대한 정책은 총독부의 의식적인 최고 정책으로 바꿔 말하면
조선사람은 독립운동이고 민족운동이고 그런 정치적 색채 있는 일은 하지 말고 그 같은 사교 등에 정신을 쏟아서 사상적인 불만에 대한 배출구를 그 방면에서 찾도록 하는 이른바 우민정책에 따라 취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백백교에 대한 수사도 못하게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우민정책은 근대국가의 정치면에서도 위정자가 의식적으로 어떤 악정을 감추기 위하여 국민의 주의를 특히 젊은 지식인들의 주의를 다른 방면으로 쏠리게 하기 위하여 형형색색의 명목으로 그 같은 사상적 오도정책을 쓰는 예가 있는 것을 본다.
좌우간에 나는 검사직무에 결정적으로 염증이 생겨서 검사직을 내놓기로 결의했으나 앞서 말한바와 같이 자리를 내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대한 문제였다.
식민정치 하에서 직업을 얻는다는 것이 그리 용역한 일이 아닌 까닭에 나로서는 당시 거의 절대적인 요청이 되다시피 한 변호사 개업이 큰 문제로 등장되었었다.
내 자신은 원래 천성이 해괴하여 20전의 시대에는 물론이고 법원관계 취직 이후에도 이유 없이 상사의 개인가정을 찾아가 사교적인 교환을 한일이 전무하였다.
그런고로 개인의 사사로운 사정을 상사에게 진정하려면 그 자백으로 찾아가 사정을 호소하고 그의 조력을 요청하는 것이 상례이나 나 자신은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관계로 그 방법을 택하기에 어려운 사정이었다.
그렇지만 24년 가을 어느 날 나는 눈을 질끈 감다시피 하고 현재의 남창동에 있던 경성지방 검사장 고원탁랑의 관저를 찾아갔다.
고원 검사장은 나를 대단히 반기며 『그대가 나를 방문하는 일도 있냐』며 환대를 했다. 그는 다과를 내놓고 또 자기가 수집한 서화골동까지 내보이며 자랑을 늘어놓았다.(일본인들의 예법에서 서화·공동을 보여준다는 것은 극진한 대접을 뜻한다)
나의 뜻은 검사직을 물러날 것을 표명하고 그의 도움을 청하는데 있었지 골동감상에 있을 리 만무해 어떻게 하든지 사직이 허용되도록 요청할 기회를 살폈으나 고원 검사장은 장황 설을 펴면서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한동안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억지로 용기를 내어 「검사의 직을 그만 두겠으니 사직 후에 경성법원관하 관내에서 변호사직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고원은 발연변색 하면서 『자네들은 조선인 판검사 직을 마치 조선인 변호사 양성기관인양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나무라며 『군으로 말해도 검사임관 후 반년 남짓해서 조선총독부 개청 이후 전례가 없는 고등관에의 1계급 승진에, 근무 1년만에 또 1계급승진이라는 이례적인 특별승진을 거듭시켰고 또 경성법원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경원내규를 개정해가면서까지 조선인검사 직을 새로이 두도록 한 뒤 군을 경성에 끌어 올렸는데 1년 남짓하여 그만 두고 변호사업을 하겠다니 언어도단이다』라고 노발대발하였다.
그 이튿날 검사국으로 출근하였더니 고원 검사장은 즉시 나룰 불러 검사직을 사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말로 회유하여서 나를 곤란하게 하였다. 그럴수록 나는 날마다 검사의 직무수행에 염증이 더해갈 뿐이어서 그후 적당한 기회에 이번에는 법무국 법무과장 수야중공을 회현동 자택으로 찾아갔다.
수야 과장에게 고원에게서와 같은 취지의 요청을 했으나 수야 역시『너를 부검사정을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로 경성으로 끌어올렸고 또 지방검사국 지청의 상석검사로 보낼 것을 고려 중에 있다』며 적극 만류했다.
수야는『현재 평양지방법원 진남포 지청의 상석검사가 비어있는데 그리로 갈 생각은 없냐』고 내게 물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