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식의 똑똑 클래식] 딸 향한 리골레토의 '외골수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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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김근식
음악카페 더 클래식 대표

오페라 리골레토는 16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국가 만토바 공국(公國)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국은 봉건시대에 공작이 통치하던 작은 국가를 말한다.

 리골레토의 원작인 빅토르 위고의 희곡 ‘방탕한 왕’에는 궁정의 장애인 광대가 프랑스의 왕을 죽이려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당시 귀족이 오페라의 주 관객층이어서 이 내용이 리골레토에 그대로 옮겨 질 수 없었던 모양이다.

 리골레토에서는 가상의 시기와 국가를 배경으로 각색됐다. 방탕한 귀족, 장애인, 청부살인업자와 그의 여동생인 매춘부 등 리골레토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한결같이 비정상적인 인물들이다.

2007년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오페라 `리골레토`.

 하지만 단 한 사람, 여주인공인 질다(리골레토의 딸)만이 순결의 상징이다. 꼽추에다 다리까지 절룩거리는 리골레토에게 딸 질다는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의 이유다. 극중에서 묘사되지는 않지만 리골레토도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기에 남몰래 키우는 딸이 있었을 것이다.

 리골레토가 궁정에서 귀족들에게 재주를 부리고 때로는 그들이 지목하는 여인들을 꼬드겨 잠자리에 들게 하는 채홍사 역할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이유는 오직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운 딸 질다 때문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마음을 빼앗긴 남자가 다름 아닌 방탕한 귀족 만토바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리골레토가 받았을 충격과 상실감은 딸을 키워보지 않은 남자라면 모를 것이다.

 어떤 면에서 리골레토는 두 사람을 동시에 키운 셈이다. 하나는 그가 공적인 직업으로 악의 길로 향하도록 훈련시킨 만토바 공작이요,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사적인 영역에서 미덕의 길로만 양육한 딸이다. 그런데 결국 이 둘이 엮이고 만다는 설정에 관객들은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페라 리골레토의 원작자인 베르디가 의도한 에로의 감정이입이다. 1막에서 교회에 가는 것 외에는 일체 외출이 허용되지 않는 갇힌 삶을 불평하며 질다는 “아버지의 이름도 직업도 고향도,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서도 모르고 시내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다”며 불평을 털어놓는다.

 이런 딸에게 리골레토는 “그런 건 알 필요도 없다. 나는 세상에서 너를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요, 너는 나의 유일한 가족이요, 고향이자 신앙”이라고 답한다. 그렇게 귀하고 소중한 딸이 공작에게 납치되고 리골레토는 광대복장의 미천한 모습으로 딸을 찾아 헤맨다.

 마침내 딸을 찾았을 때 질다는 추행 당한 흔적이 역력한 모습이었지만 자신도 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들키고 만다. 비록 망나니 같은 인생을 살지만 딸 앞에서 만큼은 늘 신사처럼 행동했던 아버지였다. 리골레토는 자신의 본래 모습(광대)을 딸에게 들킨 순간부터 딸을 능멸한 만토바에 대한 살의를 갖게 된다.

 오페라 리골레토는 앞서 밝힌 대로 가상의 시기와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후 수백 년이 흐르고 인류의 문명은 놀랍게 발전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면수심의 성폭행 관련 보도, 특히나 어린 딸을 상대로 몹쓸 짓을 했다는 끔찍한 사건을 접하며 살고 있다. 울부짖는 피해 여성들의 아버지들을 볼 때마다 리골레토 2막에서 “내 딸을 돌려달라”며 외치는 리골레토의 절규가 떠오른다.

김근식 음악카페 더 클래식 대표 041-551-5003
cafe.daum.net/the 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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