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33)제34화 조선변호사회(8)|<제자 정구영>정구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경성변호사회>
변호사법 공포 이후 한성에는 법령상「한성변호사회」를 두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록상에나 있는 것이지 실제로 독립된 사무소를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종로 네거리에 있는 한성재판소의 건물은 그 명칭이 경성지방재판소로 바뀌고 또 이어서 대한제국의 재판소가 통감부재판소로 바뀌던 무렵에 지금 보면 구식이나 그 당시의 건물로는 최신식의 구미식 건물을 지어서 도심지인 종로1각에 그 위용을 과시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몇 사람의 변호사들이 재판소에 출입할 때마다 들를 수 있는 시설을 하여 놓은 소위 변호사 공실이란 이름의 유대실이 생겼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경성지방재판소 건물이 세워진지 약 10년 뒤인 1919년에야 나는 경성지방법원 서기로서 그 건물에 출입하기 시작했는데 반세기도 넘는 54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당시 법원의 본건물인 2층 건물이외에 십오륙평 정도 되는 목조와즙의 소위 화양식 단층 건물로 된 독립가옥이 있었는데 그 건물이 바로 변호사 공실이었다.
그 건물 정문에는「변호사 공실」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 때에 법령상 있었던「경성 조선인 변호사회」및「경성 일본인 변호사회」라는 간판은 없었으나 일본인 변호사회의 사무는 그 공실에 근무하는 일본인 사무원이 일본인회의 장부와 기록을 보관하는 궤짝과「테이블」을 놓고 사무를 보았는데 조선인·일본인의 구별 없이 변호사들의 심부름을 도맡았었다.
그에 반해 조선인 변호사회의 사무는 해마다 당선되는 변호사회 회장이 자기 개인의 사무원을 시켜 회의 부서와 기록을 회장의 자택에 보관하고 있던 때로「경성조선인 변호사회」라는 간판을 그때그때 회장 개인의 사무소에다가 개인사무소 간판과 나란히 걸어 놓았었다. 말하자면 경성조선인 변호사의의 사무실은 해마다 새 회장의 사무소로 전전하며 운영되었었다고 기억된다.
내가 경성전수학교를 자퇴했다가 두 번째로 입학한 것이 1916년인데 그때 나는 종로재판소 근처 청진동에 주택과 사무실을 가진 종형인 고 정구창 변호사의 자택에 기숙하며 통학하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또 그 당시 내 나이 20세의 웬만한 지각은 났던 때였기에 종형의 심부름으로 가끔 법원에 출입한 일이 있었다.
그 보다도 수년 전 즉 내 나이 십육칠세 때에도 법원을 드나든 적이 있었다. 그때는 종형인 정구창이 경성지방 재판소 판사로 있었던 관계로 종형의 가정과 종형간의 연락관계로 가끔 출입했었다.
그러기에 경성지방재판소 건물과 그 건물내부는 내게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았다. 또 종형이 그때 신진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던 관계로 적은 수의 조선인 변호사들 사이에 비교적 존재가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조선인 변호사들과는 빈번한 연락이 있었다. 그런 관계로 당시의 조선인 변호사들은 대개 알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나는 사람들은 이면우, 장수, 유문환, 박만서, 박승빈, 최진, 정명섭, 김정목, 홍우석, 심종대, 이종하, 이한길, 허용, 김찬영, 김종건, 김우영 등과 갓 개업한 이승우, 그밖에 십수 명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19l2년 3월 총독부는 민사령·형사령을 공포함과 동시에 총독부 재판소령을 개정하여 종전의 구 재판소를 지방법원지청, 지방재판소를 지방법원, 공소원을 복심법원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변호사회에 관한 사항은 1910년 12월 공포한 조선총독부 변호사 규칙을 그대로 두어서 경성지방법원 관할에 한해서는「경성제일」(일본인),「경성제이」(조선인)의 두 변호사회를 그대로 두었었다.
그리하여 1919년 2월쯤으로 기억되는데 변호사령을 개정하여 경성법원 관할에서도 경성변호사회란 1개의 회만 두도록 강요하여 그 때까지 있었던 일본인회·조선인회의 두 회를 없애도록 했다. 그래서 그 해 4월에 조선「호텔」에서 두 회를 합동한 경성변호사회의 창립총회를 갖게되었다.
창립총회는 조선인 변호사들이 입원중인 이한길 변호사를 들것에 뉘어 투표장까지 데려와 그 결과는 조선인 장도변호사가 차점인 일본인 대구보아언보다 1표 더 많은 수로 당선이 되었다. 대회는 또 상임위원 20명으로 조선인·일본인 각 10명씩을 뽑았다.
당시의 변호사령은 선거의 결과가 그대로 발효하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를 조선총독에게 보고하고 그 당선을 인가해달라는 청원을 하여서 총독의 인가를 얻은 후라야 비로소 임원에 취임할 수 있는 법조문이 제정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창립총회를 마친 초대회장 장수 변호사는 그 임원선거 결과를 총독에게 보고하고 인가해 줄 것을 신청했으나 선거결과에 격분한 일본인 변호사들은『식민지에 와서 식민지 사람의 회장 밑에서 회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은밀히 조선총독에게 그 인가신청을 각하 하도록 운동을 벌였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