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2)제34화 조선변호사회(7)|<제자 정구영>정구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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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초기의 일인들>
초기에 변호사가 되려면 대개 구한국시대 및 통감부의 판·검사를 지낸 자이거나 대한제국이 실시한 변호사시험(단2회로 끝이 났다)에 합격한 자 또는 법부의 서기관 출신관료나 일본의 제국대학 법학과 졸업가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몇몇을 제외하고는 판·검사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신식법을 등에 접촉할 기회가 적었던 탓으로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일들이 많았다는 것은 불가피 했던 일로 여겨진다.
당시 변호사는 을사보호조약체결 꼭 10일 전인 1905년11월8일에 공포된 대한제국변호사법에 의해『민사 당사자나 형사 피고인의 위임에 의하여 통상 재판소에서 대인의 행위와 변호권을 행하는 것』(제1조)으로 되어 있었다.
대한제국변호사법은 일본의 것을 요약해 번역한 것으로 지금 보면 미흡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문과 부칙 등 35조로『형사에 관하여 징역 5년 이상의 죄에 상당하다고 사유되는 경우에, 형사 피고인이 변호사를 선정치 아니한 시는 재판소가 직권으로 선정함을 득함이다』(15조)든가 또는 판. 검사 재직시 관리한 사건이나 중재계약에 의해 중재인으로 관리한 사건에 대해서는 변호사 노릇을 못하게 하는 등 인권의 보호와 소송업무에 대한 한계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법이야 어떠했든 실제로 변호사 업무를 맡은 사람들은 해박한 법률지식보다는 풍모가 좋아야하고 구변이 있어야 우선 한 점을 접어들어 갔다고 전해진다.
이에 반해 초기에 이 나라에 온 일본인 변호사들의 수준은 비교적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면 혹시 나를 보고 어떤 비난의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통감 이등박문이 처음 왔을 때 자기 나름대로 의욕을 갖고 일하려 했던 흔적이 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이 그네들보다 문화가 높았던 나라인 까닭에 그 통치에 실패를 한다면 일본의 국가적인 명예에 중대한 영향이 있을 것이므로 선정으로 조선인의 신뢰를 받음과 동시에 대의적으로도 일본의 정치능력을 과시해보겠다는 야망 아래 그들의 사회에서도 비교적 명망있는 1급 관료들을 대량으로 데려왔었다.
일본 내무관료의 수재로 알려진 우좌미승부를 내부에 발탁하고 대장관료 황정현태낭을 도지부(지금의 재무부) 고문으로, 사법관료로서는 창부용삼낭(뒷날 추밀원의장)·도변창·국분삼해·성수마 등을 사법분야 책임자로 기용하였다. 또 그 정신은 그 후에 행해진 총독부 인사행정방침에 답습되었고 특히 사법부 인사의 경우 1908년 동경·경도 두 제대법과 출신의 원정정·수야중공·희두병일·삼전수흠낭 등「엘리트」판사들을 대거 몰아왔다.
일본인 변호사로서 1908년 통감부사법부 수뇌들과 함께 조선에 온 사람들은 조창외 무철과 대구보아언 등이다.
일본인으로 조선에서 최초로 변호사업을 시작한 조창외무철은 동경제대 법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수재중의 수재였다.
그는 인물도 출중했기에 졸업하자마자 당대 일본 제1의 재벌인「미쓰비시」총수의 맏사위가 된 사람이다(둘째 사위는 후일 헌정회 내각의 총리대신 가등고명). 그러나 조창이 동경시의원으로 있을 당시 모종의 독직사건에 관련되어 징역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아 시 의원직은 물론 갖고 있던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또 개인적으로는 그의 부인과 이혼까지 강요당하는 등 불운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친교가 있던 이등통감과 사법부담당 창부용삼낭 등은 신수불길해서 변을 당하고 있는데 동정하여 법역이 다른 조선에 와서 변호사로 개업할 것을 종용, 이에 따라 경성에 와서 개업했었다.
그가 개업하고 있을 때 어떤 사건을 맡았었는지는 잘 기억되지 않으나 그는 30 갓넘어 조선에 와서 50넘어 죽을 때까지 지금의 시평노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대구보아언 역시 동경제대 출신의 수재로 이등의 권고에 따라 이곳에 와서 몇 햇 동안 통감부의 상당한 보호를 받으며 개업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여담이지만 앞서 말한 사법관료 중 원정정·수야중공·희두병일·삼전수흠낭 등 4명은 이곳에 판사로 올 때 사법관시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조선의 법관으로 왔었다. 그 때문에 십수년 뒤 총독부 재판소와 검사국의 중견간부(원정정은 지금의 대법원장 격인 고등법원장, 수야중공은 검찰총장 격인 고법검사장)가 된 후 법무국안의 인사행정상 두 사람을 법무행정의 책임자로 채용할 필요성이 있었으나 그 때의 고등문관 임용령에 묶여 문제가 됐던 적이 있었다.
당시 고등문관 임용령은 판·검사의 재직연한이 3년 이상인 때에는 행정관으로 채용할 수 있다는 법조문은 있으나 그 채용되는 행정관 역시 1년6개월의 행정관 시보를 마치지 않으면 될 수 없다는 법의에 따라 최초의 판·검사직을 맡을 때 사법관 시보를 이수하지 않은 원정정 등 4명의 법관이 총독부 사무관에 채용될 수 없는 형편이었었던 것이다.
문제가 이쯤 되자 일본 내각에서는 총독부 인사행정에 지장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네 사람은 통감부 재판소 설치 당시 그들이 당연히 시보를 마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가적인 필요에 따라 정부당국의 요청에 의하여 그 기간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조선에 판사로 온 것은 말하자면 일본의 국책에 희생당한 것이라는 점을 중시하여 조선정부의 초빙에 의해 판·검사로 간 사람은 시보를 거치지 않고도 고등문관에 임용될 수 있다는 특별조문을 제정하여 전원구제 했었다. 내가 굳이 이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비록 그 문제가 네 사람 개인의 신분권에 관한 것이지만 국가가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욱 그 개인에 대하여 국가는 보답합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일본 국회의 결의를 거쳐 그와 같이 입법하였다는 점, 국민의 권리를 신장하여 억울함이 없게 했다는 그 정신이 부럽고 또 배울만한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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