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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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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갑생 기자 중앙일보 교통전문기자
강갑생
JTBC 사회 1부장

신년을 맞아 쏟아진 사자성어들 가운데 눈길이 가는 게 하나 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이다. 논어에 실린 공자의 말이다. 공자는 좋은 정치를 설명하면서 풍족한 식량, 충분한 군대, 백성의 믿음을 꼽았다. 또 다른 건 다 포기하더라도 백성의 믿음은 놓치면 안 된다고 했다. 믿음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도 이 사자성어에 주목한 건 현 정부의 상황 때문이다. 지금 정부는 뭘 얘기해도 국민들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물론 정치적 성향에 따라 상대편 말은 아예 안 믿는 현상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가 불신을 키우는 측면이 더 커 보인다.

 기초연금 공약만 해도 그렇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매달 20만원씩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실제론 소득 상위 30%는 제외하고 국민연금 가입기간에 따라 연금액이 달라지는 방식이 결정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공약포기가 아니고 실행에 옮기지 못한 부분들도 임기 내에 반드시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재 재정상황, 향후 재정 전망을 봐도 기초연금 폭을 더 넓히긴 상당기간 어렵다. 다른 복지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솔직한 현실 인정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런데도 계속 추진하겠다니 믿음이 가기 어렵다.

 증세 논란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내년부터 연말정산 방식을 현행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꾼다. 복지공약을 실천할 돈이 부족하니 세수를 어떻게든 늘리려는 노력 중 하나다. 연봉 5500만원 넘게 받는 회사원들은 세금이 늘어나게 된다. 연말정산을 통해 돌려받던 세금도 줄어들고 때론 추가로 더 내야 할지도 모른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대략 200만 명가량이 해당된다. 당사자들로선 엄연히 증세다. 하지만 정부는 세목을 신설하거나 세율을 올린 게 아니라서 증세는 아니라고 강변한다. 분명 호주머니에서 세금은 더 나가는데 증세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지난 연말을 뜨겁게 달궜던 수서발 KTX 자회사 논쟁도 같은 맥락이다. 민영화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초기엔 코레일에 손실을 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따져보자. 코레일로서는 직접 운영하면 100% 들어올 수입이 확 줄어드니 피해가 불가피하다는 게 요지다. 코레일 경영개선에 도움이 안 되는 자회사를 왜 하느냐는 비판도 여기서 나온다. 초기엔 그럴 가능성, 개연성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무조건 사실과 다르다고만 한다. 차라리 손실 가능성은 인정하되 그래도 자회사를 해야 하는 이유, 그 절박한 이유를 설명하는 게 훨씬 설득력 있을 듯하다.

 새해엔 부디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러고 나서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자. 그래야 국민이 믿을 수 있다. 믿음·신뢰를 잃어버린 정부는 제대로 일을 하기 어렵다. 무신불립, 오늘날에도 통하는 얘기다.

강갑생 JTBC 사회 1부장